송희영 주필

트럼프 열기를 보려고 유튜브 동영상을 몇 개 보았다. 정말 막말의 달인인가 싶었고, 수시로 말을 바꾸는 변덕과 무식한 직설 발언도 듣고 싶었다.

유세장 분위기는 예상대로 종교 집회를 닮았다. 이슬람 이민자에게 아이를 잃은 엄마가 자신의 경험담을 말했다. 이슬람교도의 이민을 배척한 트럼프 공약에 맞춘 신앙 간증 같은 찬조 연설이다. 이어 록 밴드가 트럼프 찬양가를 부른다. 지지 연설이 지루해질 때쯤 되면 트럼프가 무대에 올라 정열적으로, 때로는 익살스럽게 연설한다. 그가 '위대한 미국의 부활' '미국 최고'를 외칠 때마다 관중은 '할렐루야' '아멘' 합창하듯 환호한다.

흑인 표를 거의 싹쓸이했던 오바마의 유세 때는 대개 1000명 단위의 청중이 공원·광장을 메우곤 했다. 부시 대통령이 대선 후보였을 때는 수백 명이 가득 찬 강당이 TV에 자주 등장했다. 트럼프 유세장은 스타디움 아니면 대형 돔구장이다. 수만 명이 몰린다는 얘기다. 미국에선 자발적이지 않으면 도저히 모을 수 없는 군중이다.

연설은 영락없이 선동이다. 포퓰리스트 선동 정치인으로서 첫째 자격은 쉬운 영어를 쓴다는 것이다. 그의 연설은 초등학생도 알아들을 것이다. '먹물들'이 쓰는 3단 논법은 쓰지 않는다. "(일본의) 아베는 살인자다. 지옥 같은 엔화 약세 정책으로 미국을 죽인다." 짤막한 2단 논법이다.

타도해야 할 적(敵)도 분명하다. 이슬람교도와 불법 이민 멕시코인들에게 화살을 난사한다. 한국·일본은 안보 무임승차, 중국은 일자리와 돈을 훔쳐 가는 도둑이라고 공격한다. 선동가에게는 감성적 단어도 필수품인 듯싶다.

여론 주도층이 보는 뉴욕타임스만 읽어서는 트럼프를 알 수 없다. 하버드대 교수나 거물 정치인들의 발언만으로 평가해서도 안 된다. 기존 언론, 유명 대학, 정치 거물들이야말로 트럼프가 단골 공격 대상으로 삼는 적일 뿐이다. 그들이 트럼프를 고이 감싸줄 리 없다.

트럼프 유세를 듣다 보면 놀랍게도 한국이 저절로 떠오른다. 경제는 침체했다. 비정규직과 청년 실업은 늘고 있다. 서민들 삶은 궁색해지건만 부자들은 갈수록 떵떵거린다. 정치는 여야가 다툴뿐더러 여당이나 야당이나 당내 파벌끼리 싸움을 멈추지 않는다. 대통령이 내놓는 처방은 거기나 한국이나 효과가 없다.

이처럼 많은 국민이 가라앉는다고 걱정하는 나라의 변방(邊方)에서 등장한 영웅이 바로 트럼프다. 그는 민주당과 공화당을 오락가락했다. 여자를 밝히고 입도 가볍기 그지없다. 워싱턴의 기준, 하버드대 규격에는 한참 미달이고 뉴욕타임스엔 가십 면에나 실릴 얼굴이다.

하지만 지지자들은 그의 무지(無知)도 다른 후보들보다 심한 것이 아니라고 본다. 말 바꾸기는 성공한 협상가의 유연함으로 포장되고, 잦은 막말은 단지 두뇌 회전보다 입이 과속(過速)했을 뿐이라는 식이다.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트럼프가 무능하고 부패한 인텔리 계층과 싸우겠다고 나선 검투사라는 사실이다. 그는 미국 역사를 관통해 온 반지성(反知性) 주의의 큰 물결에 올라탔다. 미국의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란 지식과 교양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 엘리트 집단의 특권적 지배에 저항하는 보통 시민들의 생각을 말한다(역사학자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 한국식으로 보면 트럼프가 기득권 세력과의 전쟁을 시작한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면 우리는 안보 정책부터 전면 수정해야 한다. 핵무장 결단을 내리지 않을 수 없고, 미군 철수의 공백을 메우는 투자도 미룰 수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도 재협상하고 국내 기업들은 무역 보복의 대상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다음 대통령을 뽑기도 전에 대한민국을 지탱해온 기둥들을 교체하지 않으면 안 되는 충격을 겪을 수 있다.

이제 트럼프를 정신 나간 '또라이'로 비아냥거리며 대통령 당선을 부정할 시기는 지났다. 미국 역사에는 엘리트들 눈에 '별종' '이단자'로 분류되는 사람이 여럿 대통령으로 등장한다. 그중 앤드루 잭슨이나 로널드 레이건은 성공했다. 힐러리 클린턴이 승리한다고 해도 트럼프의 일부 공약을 정책에 반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민심의 흐름이 그렇기 때문이다.

트럼프 시대에 대비하는 것과는 별도로 우리야말로 트럼프처럼 다짜고짜 나라를 수렁에서 구하겠다고 나서는 '영웅'을 기다려야 할 판이다. 정치는 분열돼 있고 경제는 제자리걸음이다. 그 한가운데 금수저로 태어나 갖은 추태를 일삼는 재벌 후계자들, 권력 중독에 빠져 제 몫만 챙기는 정치인들, 알바·계약 사원들에게 한 푼도 양보하지 않는 정규직 노조들이 버티고 있다. 트럼프가 '살인자' '도둑'으로 몰아세울 만한 세력들이 너무 설치고 있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