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상훈 논설주간

[정진석 "새누리당에 내 편이 없다. 나 혼자다"]

이번 총선 여당 참패는 영어로는 랜드슬라이드(landslide)라고 한다. 산사태처럼 무너졌다는 것이다. 한국인이 질색하는 것은 권력자, 가진 자의 오만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맘에 들지 않는 의원들을 다 잘라내려는 오만을 부리지 않았다면 공천 분란은 애초에 일어나지도 않았다. 대체 왜 저럴까 싶은 오기와 아집이 명백히 예견된 대승을 기록적 대패로 바꿔놓았다.

선거는 카타르시스 작용을 한다. 투표장에 가지 않았거나 다른 당을 찍은 여당 지지자들은 속 시원해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너무 했나' 하는 걱정도 하게 된다. 이런 걱정이 모이면 다음 선거에선 또 다른 결과를 만들어내곤 한다. 그것이 민주국가에서 이어지는 승패 교대의 선거 역사다. 다만, 그렇게 되려면 산사태가 제대로 나야 한다. 쏟아질 흙더미는 다 쏟아져야 한다. 그러지 않고 흙더미가 산 위에 남아 있으면 다음 선거에서 또 쏟아진다. 지금 박 대통령과 친박은 쏟아지는 흙더미까지 막겠다며 버티고 서 있다.

여당 원로 한 분의 말이다. "민심이 거부해 선거에서 진 측은 네 가지를 해야 한다. 첫째 선거에서 졌다는 사실을 바로 인정해야 한다. 둘째 그 패배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걸 함께 인정해야 한다. 셋째 잘못된 부분을 원상회복해야 한다. 넷째 재발 방지책을 제시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가 카타르시스가 되고 반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

박 대통령은 지금까지도 선거 패배 사실 자체를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단 한마디도, 형식적으로라도 하지 않고 있다. 그 패배가 자신이 아닌 비박과 언론 탓이라고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반성이란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원상회복해야 할 것도 없고, 재발 방지책을 내놓을 이유도 없다. 정작 선거에 책임이 있는 정무수석은 기세등등 그대로 있고, 정무수석에게 밀려 낙동강 오리알 신세였던 비서실장만 물러났다.

요즘 박 대통령 주변에선 새누리당을 우습게 보고 속된 말로 '까불지 말라'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다고 한다. 야당과 하는 법안 협상이든 여당 내 혁신위 구성이든 '시키는 대로 하라'는 게 아주 노골적이라고 한다. 타협 정치니 하는 것은 겉으로 하는 얘기고 속으로는 여전히 미운 놈 응징이 우선이다. 유승민 복당시킬까 봐 이제 겨우 몸을 추스르려는 새누리당을 파탄내버린다. 비박에 대해선 '나가지도 못할 테지만 나갈 테면 나가라'는 식이다.

일반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고자세는 친박 권력의 자폐(自閉)적 속성이 그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박 대통령이 40년 가까이 세상과 사실상 떨어져 살았다는 사실은 생각과 마음에 지울 수 없는 흔적을 남긴 것 같다. 그를 보스로 모시면서 '배신'과 '의리'만 따져온 친박 그룹 역시 심각한 폐쇄성을 보이고 있다.

자폐적 권력의 가장 큰 특징은 '세상은 언제나 내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것이다. 박 대통령은 얼마 전 언론과 만나 비박에 대해 "자기 정치 한다고 대통령을 힘들게 하고, 하나도 도와주지는 않고…"라고 했다. 세종시 문제 때 박근혜 대표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딱 그렇게 했지만 자폐증 권력에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다.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지, 내 위치는 어디쯤인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기능이 유별나게 부족하다면 그것은 병(病)이다. 생각과 행동이 사회의 상식과 일반의 예상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이 다 혀를 차도 자기들끼리는 '잘했다'면서 좋아한다.

이번 총선으로 친박은 정치적으로 죽었다. 부산, 서울 강남, 분당이 여당을 거부했으면 거의 탄핵이고 사망선고다. 죽을 때 확실히 죽어야 다시 살 수 있는 게 정치다. 그런데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간다고 믿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죽었다는 사실 자체를 알지 못한다. 그러니 박 대통령과 친박이 새누리당 시신 위에 올라타고 또 '이래라저래라' 하고 호통치고 뒤집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박 대통령이 탈당하면 계파 싸움이 없어지지 않겠느냐'고 기대하지만, 당을 자기 것으로 알기 때문에 탈당도 하지 않을 것이다.

죽었는데도 돌아다니는 게 좀비다. 사망 원인이 자폐증인 권력이 좀비까지 돼 세상과 동떨어진 행동을 계속하면 새누리당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가 불행해진다. 좀비는 맹목적으로 돌격한다. 국민과 국정(國政)보다는 반격을 꿈꾼다. 복수 대상은 안팎의 적(敵)이다. 안팎의 적을 다 모으면 그게 국민이란 건 좀비 눈엔 보이지 않는다.

그들에게 다음 대통령 만들기는 일거에 뒤집는 복수가 될 수 있다. 자폐 권력은 '남들은 못 했어도 나는 된다'고 확신한다. 그 나름대로 믿는 구석이 있고 작전 계획도 수립 중일 것이다. 그러다가 질 수 없는 총선을 졌고, 다음엔 대선까지 망칠 것이다. 산사태와 같은 총선 심판에도 자폐 권력이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고개를 쳐들고 있으니 대선 때 제2차 산사태는 이미 예고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대로면 박 대통령과 친박이 막고 있는 흙더미가 마저 쏟아져 내려 다 쓸고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