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5월 16일.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소집한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부르주아 반동사상을 비판하고 문화 영역에서 지도권을 탈취하자'는 선동의 깃발을 들어 올린다. 이른바 '5·16 통지'였다. 이를 신호로 마오쩌둥의 극좌 노선을 반대한 공산당 관료, 지식계층을 향한 무차별적 폭력이 대륙을 휩쓸었다. 마오가 세뇌시킨 10대 홍위병들이 그 선봉에 섰다. 마오는 이를 통해 정적을 숙청했지만 중국 사회는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제자가 스승을 때려 죽이는 인간성 말살을 겪어야 했다.

중국 현대사의 비극인 '문화대혁명'이 16일로 50주년을 맞는다. 외신들은 문혁을 대대적으로 재조명하고 있다. 영국 이코노미스트는 반세기 전 열여섯 살 홍위병 장훙빙의 참회를 소개했다. 그는 "마오를 욕하는 어머니를 밀고했다"며 "어머니는 무차별 구타를 당한 뒤 사형당했다"고 말했다.

반면, 중국 공산당과 정부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문혁 50주년을 되돌아보는 공식 행사는 일절 열리지 않고 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는 "지난 수십년간 중국의 지식인 사회에서 문혁은 금기어였다"며 "문혁 관련 논문조차 찾아보기 힘든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중국 공산당이 문혁을 공식언급한 것은 덩샤오핑 정권 시기인 1981년 6월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문혁은 '엄중한 재난을 초래한 동란'이며, 마오쩌둥은 "문혁을 초래한 과오가 있지만 전체적으로는 공(功)이 7, 과(過)가 3"이라는 평가였다. 이후 어떤 정권도, 이를 넘어서는 진일보한 평가나 언급을 내놓지 않고 있다. "마오 동지를 폄하하는 것은 당과 정부를 폄하하는 것"이라는 덩샤오핑의 말 속에 공산당의 딜레마가 담겨 있다.

시진핑(習近平) 주석 등 중국의 현 최고지도부(상무위원) 7명도 문혁을 겪었다. 이 중 시 주석을 비롯한 5명은 피해자이다. 시 주석은 당시 부친인 시중쉰 부총리가 투옥당했고, 자신은 산시성 오지로 쫓겨가 토굴에서 7년간 하방(下放) 생활을 했다. 이복 누나는 문혁 와중에 자살한 것으로 알려졌다. 위정성 상무위원도 모친이 투옥되고, 누이동생은 홍위병들의 박해를 못 견디고 자살했다. 리커창 총리, 장더장 상무위원, 왕치산 상무위원도 지식청년으로 농촌에서 하방생활을 겪었다.

그런데도 최근 중국 안팎에서는 오히려 시진핑 주석에 대한 개인 숭배 분위기가 나타나고 있다. 마오쩌둥 시대의 그림자가 다시 드리워지는 것 아니냐는 말까지 나온다.

[중국은 어떤 나라?]

대표적인 예가 지난 2일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걸그룹 '56둬화(56朶花)'의 훙거(紅歌·붉은 노래) 콘서트였다. 중국 내 56개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56명으로 구성된 이들은 이날 '당신을 어찌 부를지 모르겠다'는 등 시 주석을 찬양하는 노래들을 불렀다. 무대 배경에는 마오쩌둥과 시 주석의 모습이 등장했다.

이 소식에 혁명원로 마원루이(馬文瑞) 전 노동부장의 딸 마샤오리(馬曉力)가 발끈했다. 그녀는 공산당에 보낸 항의서한에서 "이번 콘서트에는 문화대혁명을 재현하려는 음모가 도사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반면 좌파 일각에서는 "중국이 인공위성을 발사하고 수소폭탄 실험에 성공한 것이 문혁 때였다"며 문혁을 재평가해야 한다는 주장이 흘러나오고 있다.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는 뒤늦게 시진핑 주석이 지난 1월 문혁에 대한 1981년의 평가를 재확인한 사실을 공개하며 '문혁 재평가론'을 경고하고 나섰다. 시 주석은 당시 간부들 대상 강연에서 "지도사상에 좌경화의 잘못이 나타나면서 문혁 같은 10년 동란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독일의 중국 연구자인 수잔 바이거린은 "중국이 공개적으로 문혁을 토론하고 여기서 교훈을 배우지 않으면 언제든 그런 역사가 되풀이될 수 있다"고 말했다.

문화대혁명은… 마오쩌둥 극좌 실험에 인간성 말살 狂風… 공식 사망자 170만명

문화대혁명(文革·문혁)은 대약진운동 실패로 권력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한 마오쩌둥이 1인 지배체제 구축을 위해 벌인 극좌 사회주의 운동이다. 류사오치(劉少奇)와 덩샤오핑(鄧小平)이 대약진운동으로 무너진 경제를 빠르게 정상화시키며 국민의 지지를 받자, 마오는 1966년 홍위병을 조직하고 각 분야에 뿌리내린 자본주의적 독초를 뿌리 뽑자는 명분으로 문혁을 시작했다.

마오는 1966년 8월부터 3개월간 총 1100만명의 홍위병을 베이징 천안문으로 불러 격려했다. 이후 홍위병들은 전국 각지로 내려가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공자(孔子) 묘 등 각종 문화재와 예술품이 대거 파괴됐고, 전국의 중·고교와 대학교는 폐쇄됐다. '반혁명 인사'로 지목된 사람들은 홍위병에 끌려다니며 자아비판을 해야 했고, 학대를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국가주석을 지낸 류사오치도 죽음을 맞았다.

홍위병의 동란이 무장투쟁으로 번지자 마오쩌둥은 1967년 9월 인민해방군에게 홍위병 진압 명령을 내렸다. 이듬해 7월에는 "농촌으로 가서 배우라"라는 명령을 내려 홍위병들을 해산시켰다. 이후 중국 전역에서는 당 조직을 대신할 혁명위원회가 세워졌고, 그 대부분을 군대가 접수했다. 문혁은 1976년 마오가 사망하고, 그를 추종하던 장칭(江靑) 등 4인방이 체포되면서 막을 내렸다. 문혁 기간 공식 사망자는 170만명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