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용헌

전두환 전 대통령이 5·18의 광주를 방문하고 싶어 한다는 기사를 보고 인간의 이성으로는 파악하기 힘든 업보(業報)의 순환 고리를 느꼈다. 추적해 들어가면 전두환의 뿌리는 전라도이기 때문이다. 천안 전씨(天安 全氏)인 전두환의 집안은 대대로 전북의 고부(古阜)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그러다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의 진원지가 바로 고부 아니던가. 천안 전씨였던 전봉준(全琫準)이 앞장을 섰고, 씨족사회였던 당시의 관습에서 전씨들은 동학에 적극 가담할 수밖에 없었다. 전두환 윗대는 전봉준과 같은 집안이었다. 증조부나 조부가 전봉준의 참모를 했는지도 모른다.

동학이 실패한 후 처절한 보복이 뒤따랐다. 일본군과 관군이 합동으로 동학 가담자들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참혹하게 살육하였다. '일본군이 동학 집안 사람을 죽여 창자를 탱자나무 울타리에 걸어 놓았다'는 이야기가 지금까지 전해진다. 동학 후유증으로 전라도의 뿌리가 해체되어 버렸다. 전두환 집안은 고부에서 살 수가 없었다. 일단 20리쯤 떨어진 전북 부안군의 줄포(茁浦)로 피신했으나 여기도 안전하지 않았다. 결국 섬진강을 건너 경상도 합천(陜川) 산골로 도망갔던 것이다. 동학의 중심지인 전북 고창(高敞)에는 고려 말부터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던 70여 개의 성씨(姓氏)가 있었으나 동학 이후에 약 70%의 성씨가 사라져 버렸다. 멸문(滅門)이 되거나, 상대적으로 안전한 경상도로 도망가거나, 성씨를 바꿔버렸던 것이다.

필자가 파악한 바로는 경북 고령(高靈)에 살고 있는 고창 오씨들도 이때 피신한 것이고, 지금도 상주에서 천도교를 신봉하는 서묵개(徐墨价) 집안도 고창의 미당 서정주 집안이었지만 동학 때 경상도로 이주하였다. 동학의 김개남(金開南) 장군은 정읍의 도강 김씨(道康 金氏)였는데 24명의 이 집안 동학 접주가 몰살당하였다. 후손 중에는 성씨를 바꿔 박씨로 살다가 1955년에야 다시 김씨로 복귀한 사례도 있다. 국회의장을 지낸 김원기, 정읍시장 김생기가 겨우 살아남은 '도강 김씨'들의 후손이다. 전두환은 정권 잡고 나서 동학군의 첫 전승지인 정읍 이평면(梨坪面)에다가 '황토현기념관'을 세웠다. 왜 전두환은 광주와 악연을 맺게 되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