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기뻐하는 왕정훈.

지난 1일 한국체대 1학년인 왕정훈(21)은 유럽프로골프 투어 볼보 차이나 오픈(중국 베이징)에서 컷 탈락한 뒤 한국행 항공권을 샀다. 국내에서 열리는 한국프로골프(KPGA) 투어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는 행선지를 아프리카 모로코로 바꿨다. 유럽프로골프 투어 하산 2세 트로피 대회(모로코 라바트)에 참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때문이었다.

왕정훈의 소속사인 ISM 아시아의 이근호 이사는 "모로코행은 도박이었다"고 말했다. 그의 신분이 출전 확정자가 아니라 '대기 선수 3번'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공교롭게도 출전 취소 등의 이유로 딱 3명의 자리가 더 나면서 왕정훈에게도 기회가 왔다.

왕정훈을 대회에 출전할 수 있도록 해 준 '행운의 신'은 9일 대회 마지막 4라운드 18번 홀(파5)에 다시 찾아왔다. 4라운드 17번 홀(파3)까지 나초 엘비라(스페인)에게 1타 뒤진 2위였던 왕정훈은 18번 홀에서 5m 버디 퍼트에 성공하며 최종 합계 5언더파 283타를 기록해 승부를 연장으로 몰고갔다.

18번 홀 1차 연장전에서 상대는 두 번째 샷에 온그린했지만, 왕정훈은 세 번째에야 그린에 공을 올렸다. 불리한 상황이었지만 왕정훈은 기적 같은 15m 거리 버디 퍼트를 집어넣어 승부를 기어이 2차 연장으로 끌고갔다. 같은 홀 2차 연장에서 왕정훈은 6m짜리 버디 퍼트에 성공하며 유럽 투어 첫 승을 확정했다. 왕정훈은 본지 인터뷰에서 "왠지 모르게 18번 홀 그린의 길이 훤히 보였다"며 "나의 성(姓) 때문에 우승한 것 같다"며 웃었다. 모로코의 왕이었던 하산 2세(1929~1999)를 기리기 위해 만들어진 '왕의 대회'에서 공교롭게 왕(王)씨인 자기가 우승했다는 뜻이다.

그동안 칼 많이 갈았어요… 단검 입에 문 왕정훈 - 9일 유럽프로골프 투어 하산 2세 트로피 대회(모로코 라바트)에서 우승한 왕정훈이 이가 다 드러나도록 환하게 웃으며 우승자에게 트로피로 주어지는 보석 단검을 깨무는 포즈를 취했다.

왕정훈은 최경주, 안병훈, 이수민 등에 이어 8번째로 유럽프로골프 투어 대회에서 우승한 한국 선수가 됐다. 우승 상금으로 25만유로(약 3억3000만원)를 받았다. 133위였던 세계 랭킹은 88위로 뛰어올라 안병훈(24위), 김경태(43위), 이수민(68위) 등과 함께 2장인 리우올림픽 티켓 경쟁을 벌이게 됐다.

왕정훈은 우승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인 9일 저녁 다음 대회가 열리는 아프리카 동쪽 인도양의 섬나라 모리셔스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살인적 일정이지만 왕정훈은 "중국 투어, 아시안·유럽 투어를 하도 다녀서 장거리 여행이 일상이 됐다"고 말했다.

외동아들인 왕정훈은 초등학교 3학년 때 티칭 프로 자격증을 가진 아버지의 권유로 골프를 시작했다. 3년 뒤 그는 부모와 함께 한국보다 골프 환경이 좋으면서 비용 부담도 덜한 필리핀으로 골프 유학을 떠나 6년 동안 살았다. 그동안 필리핀 아마추어 챔피언십(2011년)을 제패했고, 17세 때인 2012년에는 중국 프로골프 투어 상금 1위에도 올랐다. 한국으로 돌아온 뒤에도 지난해 아시안 투어 톱10에 세 차례 이름을 올렸고, 지난 3월 유럽 투어와 아시안 투어가 공동 개최한 히어로 인디언 오픈 준우승을 해 정상급 골퍼로서 가능성을 높여왔다. 왕정훈은 "유럽 투어에서 꾸준히 성적을 올려 미국프로골프(PGA) 투어에 진출, 한국의 위상을 높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