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윤명식 한국은행 부총재보가 기자 간담회에 나와 "구조조정을 위해 국책은행의 자본 확충이 필요하다면 재정의 역할"이라며 "중앙은행 발권력을 활용하려면 국민적 합의와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고 했다. 전날 박근혜 대통령이 "구조조정을 위한 선별적 양적 완화를 적극 검토해야 한다"고 하자 곧장 공개적으로 반기를 든 것이다. 다분히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가 이날 "한국판 양적 완화는 국민과 투자자들을 불안하게 한다"며 반대하고 더민주도 같은 입장임을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는 지난달 "한국은 양적 완화를 시행한 선진국과 다르다"고 했다가 여당 공약에 반대한다는 말이 나오자 "공약을 얘기한 게 아니다"며 몸을 사렸다. 그러더니 이제는 공개적으로 반대를 표명하고 나섰다. 정치판 분위기에 따라 움츠러들었다 배짱 좋게 반발하며 오락가락하니 볼썽사납다.
한국판 양적 완화는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려는 선진국 양적 완화와 달리 한은이 구조조정 자금만 지원하자는 내용이다. 야당과 한은이 반대하는 근거는 두 가지다. 하나는 지금이 중앙은행 발권력까지 동원할 만큼 위기가 아니라는 것, 다른 하나는 한은이 돈을 찍어내면 부담이 국민에게 돌아간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조선·해운사들 빚은 78조원에 달해 이미 견디기 힘든 수준이다. 이대로 가면 수만 명의 일자리가 사라질 수 있고 거제·울산 같은 중공업 도시들은 최악 위기로 치달을 것이다. 한국은행이 돈을 대지 않겠다고 거부하면 결국 재정에서 부실 쓰레기 처리 자금을 써야 한다. 이는 100% 국민 세금 부담으로 돌아간다. 한은이 돈을 찍거나 재정을 쓰거나 국민 부담은 마찬가지다. 한은이 이걸 알면서 재정의 역할이라고 나온 것은 모든 책임을 정부에 떠넘기겠다는 말이다.
글로벌 위기 후 미국 연방준비제도는 돈을 찍어 AIG보험사와 GE 부도를 막고 GM·크라이슬러 등 자동차 산업을 구제하는 데 썼다. 발권력을 거시 경제 흐름을 살리는 데만 쓰지 않고 특정 산업, 개별 기업 회생에도 사용했던 것이다. 이렇듯 세계 중앙은행들은 발버둥치는데 한은은 '정상적인 절차' 타령만 하고 있다.
일부에서는 금리를 더 인하해본 뒤에 한국판 양적 완화는 최후 수단으로 검토하자고 한다. 하지만 금리를 계속 내려도 투자는 살아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자칫 잘못하면 추가 금리 인하로 국내 자본시장에서 외화가 급격히 유출될 우려도 있다. 이런 사정을 알면서도 한은은 야당 뒤에 숨어 반대만 하고 있다. 그렇다고 경기를 살릴 대안을 내놓는 것도 아니다. 돌파구 마련을 위해 정부와 머리를 맞대지 않으면 한국은행이 위기 앞에서 아무 역할도 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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