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4월 초만 해도 '여우 군단'(팀의 마스코트가 여우) 레스터 시티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20개 팀 중 꼴찌였다. 이들이 최종 14위로 1부 리그 잔류에 어렵게 성공하자 팬들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런 팀이 바로 다음 시즌 압도적인 기량으로 1위를 질주할 거라곤 아무도 상상 못 했다. 시즌 개막 직전만 해도 각종 베팅 사이트가 책정한 레스터 시티의 우승 배당률은 무려 5000배에 달했다.
레스터 시티가 창단 이후 132년 만에 첫 1부 리그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다. 레스터 시티 구단이 탄생한 1884년은 한국으로 따지면 고종 21년으로 갑신정변이 일어난 해다. 레스터 시티는 올 시즌 승점 76(22승10무3패)으로 2위 토트넘(승점 69)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선두를 달리고 있다. 레스터 시티는 3경기를 남기고 있다. 5월 1일 오후 10시 5분(한국 시각)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승리하면 그대로 우승을 확정한다. 세계 축구계는 인구 30만의 작은 도시 레스터를 연고로 한 축구 클럽의 동화 같은 성공 스토리에 흥분하고 있다. 레스터 시티가 주전 라인업 11명을 데려오는 데 그동안 쓴 이적료는 모두 합해서 약 420억원이다. 손흥민이 올 시즌을 앞두고 독일 레버쿠젠에서 토트넘으로 옮길 때 기록한 이적료 400억원과 비슷하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이적료(약 1300억원)와 비교하면 3분의 1에도 못 미친다.
수퍼스타가 없는 팀 레스터 시티는 세계 최고인 프리미어리그에서 살아남기 위해 '보통 선수로 효율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직력을 높이고 '선수비 후역습'으로 득점하는 방법이었다.
클라우디오 라니에리(65·이탈리아) 레스터 시티 감독은 선수들에게 많이 뛰면서 적극적으로 공을 뺏고, 빠르게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기술 면에서 약간씩 떨어지는 선수들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전략이었다. 이런 팀 컬러는 각종 데이터에서도 잘 드러난다. 레스터 시티는 올 시즌 태클 시도(경기당 33.7회)와 인터셉트(21.5회)에서 리그 1위다. 상대 패스를 막은 횟수(10.9회)도 리그에서 가장 많다. 그만큼 활동량이 많았고 열심히 수비했다는 뜻이다. 네티즌들은 "레스터 시티에는 박지성 같은 '숨은 영웅'이 10명쯤 되는 것 같다"는 평가를 내린다.
패스 성공률은 70.2%로 리그에서 가장 낮다. 긴 패스로 빠른 역습을 시도하기 때문에 그만큼 정확도는 떨어지는 것이다. 그래도 '한 방'이 터지면 유리한 고지를 선점하는 것이 축구다. 레스터 시티는 '역습의 팀'답게 프리미어리그 최고 속도 선수 톱 10 안에 3명이 이름을 올렸다.
그중 가장 빠른 사나이(최고 시속 35.44㎞)가 제이미 바디(29·잉글랜드)다. 폭발적인 스피드와 결정력을 보여준 바디 덕분에 레스터 시티의 역습 축구는 빛을 발했다.
2009년 8부 리그에서 뛰며 주급 5만원을 받던 바디는 지금 1주일에 1억4000만원을 받는 리그 최고 스트라이커로 올라섰다. 22골로 득점 3위다. '마법사'로 불린 미드필더 리야드 마레즈(알제리·17골 11도움)는 PFA(영국프로축구선수협회)가 선정한 '올해의 선수'에 뽑혔다. 레스터 시티는 22승 중 14승을 한 골 차 승리로 장식하고 있다.
한때 세계 축구의 흐름은 FC바르셀로나가 주도한 '점유율 축구'가 대세였다. 하지만 최근엔 '역습 축구'의 공세에 점유율을 앞세운 패스 축구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레스터 시티의 질주는 이런 흐름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레스터 시티가 우승하면 선수와 감독 외에 주목받을 사람이 더 있다. 1986 멕시코월드컵 득점왕인 잉글랜드의 축구 스타 게리 리네커다. BBC 해설위원인 그는 레스터 시티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응원의 의미로 "레스터 시티가 우승하면 속옷만 입고 방송을 진행하겠다"고 약속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