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태숙(66)과 이윤택(64), 연극계 두 거장(巨匠) 연출가의 손을 거치면 고전 희곡도 신작처럼 변신한다. 한태숙은 미국 작가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을, 이윤택은 러시아 작가 안톤 체호프의 '벚꽃동산'을 나란히 무대에 올렸다. 두 공연 모두 원작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새롭고 힘이 넘치는 연출로 관객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밀러-한태숙 '세일즈맨의 죽음'

"전 그저 한 푼짜리 인생이에요. 아버지도 그렇고요!" 한태숙 연출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실직과 좌절의 벼랑 끝에 선 아버지 윌리에게 아들 비프가 내뱉는 대사에는 굵은 방점(傍點)이 보이는 듯했다. 1949년 초연 뒤 '자본주의 사회 속 개인의 고립'이나 '어깨가 무거운 아버지'가 강조됐던 작품이지만, 한태숙의 시선은 그보다 훨씬 냉혹한 지점에 맞춰져 있다. 그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위선과 집착의 끈을 놓지 않은 한 인간과 그 관계망의 몰락이다.

아서 밀러 작, 한태숙 연출 ‘세일즈맨의 죽음’(위 사진)과 안톤 체호프 작, 이윤택 연출 ‘벚꽃동산’.

[한태숙 극단 물리 대표는 누구?]

[이윤택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누구?]

주인공 윌리 로먼은 성공을 위해 끊임없이 발버둥치지만 은행 잔고는 바닥을 드러내고, 장성한 두 아들은 제대로 취직도 못 한 상태다. 그런데도 현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파국을 맞을 때까지 허세와 추억 속에서 살아간다. 윌리 역 손진환은 매순간 삶의 피로가 묻어나는 듯한 현실적인 연기로 공감을 샀고, 속으로 꾹꾹 눌러담은 감정을 조금씩 분출하는 예수정의 세련된 연기도 주목할 만하다.

체호프-이윤택 '벚꽃동산'

20세기 초 러시아, 옛 지주 계층이 몰락하고 새로운 상인 계층이 부상하는 사회 변화를 그린 체호프의 '벚꽃동산'은 담담하고 지루하기로 유명한 희곡이다. 그러나 이윤택은 두 시간 동안 기울어진 무대 바닥 위에서 등장인물 10여명이 서로 충돌하며 요란하게 지지고 볶는 작품으로 바꿔 놓았다. 그의 말대로 "리얼리즘 극을 운명극으로 다시 해석했기 때문"이다.

작품의 인간 군상(群像)은 그 하나하나가 21세기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을 만큼 생동감이 넘쳤다. 여지주 라네프스카야(김소희)는 정원을 바라보며 과거를 회상하다 이윤택 전작 '혜경궁 홍씨'의 주인공처럼 비탄 속에 빠져 오열하고, 농노의 아들로 태어나 큰돈을 모은 로파힌(윤정섭)은 경매에 부쳐진 벚꽃동산을 사들인 뒤 광기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세상을 꿰뚫어 보는 듯 잘난 체하는 운동권 대학생 페차(오동식)는 정작 자기 신발조차 챙기지 못하고 허둥댄다. 온몸의 에너지를 다 무대에 쏟아내는 듯한 연희단거리패 배우들의 열연은 이 작품을 강렬한 굿판처럼 보이게 했다. 아무리 세상이 바뀌고 연극이 막을 내려도 그들 모두는 또다시 각자의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는 긍정적인 메시지가 뚜렷했다.

▷'세일즈맨의 죽음' 5월 8일까지 예술의전당 CJ토월극장, (02)580-1300

▷'벚꽃동산' 5월 15일까지 혜화동 게릴라극장, (02)763-1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