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입학시험 명칭이 학력고사이던 1980년대 어느 날, 학력고사가 끝난 뒤 서울 P고와 S여고 3학년 학생들끼리 '교팅'이란 것을 했다. 학교 대표 50명을 엄선해 100명이 단체 미팅을 했던 것이다. 선발 기준은 미모와 성적, 성격까지 두루 감안됐으나 선발위원이 누구였는지는 비밀이었다.

어쨌든 두 남녀 고교의 아이들 100명이 경복궁 앞에 모였다. 무려 경복궁! 롯데월드도 없고 여의도공원도 없었으며 광화문광장도 없던 시절, 100명의 아이들이 모일 만한 곳은 고색창연하게도 경복궁밖에 없었던 것이다. 50명씩의 테스토스테론과 에스트로겐 결정체들이 모여 서툰 짝짓기를 막 시작하려 할 때, S여고 쪽 주선자로부터 급한 정보가 전파되기 시작했다. S여고 학생주임이 이날의 '교팅'을 간파하고 현장으로 출동했다는 것이었다.

100명의 남녀 예비 청춘들은 광화문 앞 대로를 뛰어 덕수궁으로 향했다. 경복궁에서의 회합이 무산됐으니 갈 곳은 창경궁이나 덕수궁 그것도 아니면 서오릉이나 동구릉이 돼야 할 것이었다. 어쨌든 이들은 약 1.5㎞에 이르는 경복궁~덕수궁 구간을 뛰어가다가 자연스레 사분오열했고, 그중 P고 남학생 중 한 명은 S여고 최고의 미모를 자랑하는 여학생과 얼렁뚱땅 짝이 되어 지금의 새문안교회 건너편 한 카페로 샜다.

그 카페조차 안전지대는 아니어서 서울 시내 모든 학생주임이 총출동해 100명 전원 검거 작전에 돌입했다는 소문이 들렸고 두 사람은 급한 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당시 한국 최고의 핫 플레이스인 방배동 카페골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래 봐야 둘은 아직 어른 흉내를 내는 19세였으므로 주스와 콜라를 마시고 대충 헤어졌다. 이튿날 P고의 문·이과를 통틀어 입술 근육 좀 푼다는 아이들이 모두 그 남자아이 책상으로 몰려들었다. "걔 어땠냐" "둘이 뭐했냐" "얼마나 예쁘더냐" 뻔한 질문들이 쏟아졌다.

그 남자아이는 엊그제 만난 내 친구였다. 한 학년에 700명 넘던 시절, 전교 대표 50명에 뽑힌 잘생긴 내 친구다. 오늘 경복궁 근처에 밥 먹으러 갔다. 덕수궁에서 가까운 회사까지 걸어갈까 하다가 그냥 마을버스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