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 둘러싼 수많은 이슈 중에 누구도 부인 못 하는 사실이 있다. 삼성이 잘돼야 나라도 잘된다는 것이다. 반대 논리도 성립한다. 삼성이 잘못되면 나라 경제가 휘청한다. 그래서 삼성을 보는 국민의 마음은 월드컵 축구를 보는 심정과도 같다. 세계경제 전쟁에서 '국가대표' 삼성이 잘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삼성을 일류 기업으로 변신시킨 이건희 회장의 신(新)경영은 위기감의 산물이었다. 1993년 당시 이 회장은 심한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세계시장에서 삼성은 싸구려 저질로 취급받았다. 아무리 품질을 강조해도 생산 현장에 먹혀들지 않았다. 망할지 모른다는 공포에 이 회장의 체중은 10㎏이나 빠졌다. 살아남으려면 변해야 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꾸라"는 신경영은 그렇게 절체절명의 고비에서 탄생했다.
23년 뒤 이재용 부회장이 '스타트업 삼성'을 제창했다. 삼성의 체질을 갓 창업한 신생 기업처럼 혁신하겠다는 구상이다. 관료주의를 깨고 군대 같다는 상명하복 문화도 개조하겠다고 했다. 이 부회장의 구상은 신경영의 '이재용 버전'이란 표현이 적당하다. 아버지가 그랬듯 자신도 삼성의 DNA를 바꿔놓겠다는 것이다.
'스타트업 삼성' 역시 이 부회장의 위기의식에서 출발하고 있다. 사내 회의에서 이 부회장이 위기론을 펴는 일이 잦아졌다. 한 분기에 6조원씩 이익 내는데 위기라니. 그러나 결코 엄살이 아니다. 지금 삼성이 위기 국면에 처했다는 데 대부분 전문가가 동의한다. 그것도 판 자체를 바꿔야 살아남을 수 있는 구조적 위기다.
영업 실적만 본다면 착시(錯視)에 빠지기 쉽다. 지금의 호(好)실적은 과거에 뿌린 씨앗의 결과일 뿐이다. 삼성이 불안한 것은 미래다. 삼성이 IT 하드웨어 시장을 독주하며 단물 빨던 시절은 끝나간다. 스마트폰도, 반도체도, 중국에 패권을 넘길 날이 닥쳤다. 반면 그 이후의 성장 동력은 변변치 않다. IT의 주무대는 소프트웨어 쪽으로 중심 이동하고 있다. 삼성은 하드웨어의 세계 최강이지만 소프트웨어는 아니다.
휴대폰 세계 1위 노키아가 망하는 데 3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삼성도 '노키아식(式) 쇠락'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가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지금 삼성에 필요한 것은 시장을 선도할 창의적 혁신이다. 그러나 삼성은 관료주의와 경직된 체질이란 치명적 핸디캡을 안고 있다. 이런 고비에서 이 부회장이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스타트업' 구상은 신경영 못지않은 중대한 시도다. 이것이 성공하느냐에 삼성의 미래가 달려 있다. 그런데 이 부회장이 처한 상황은 아버지보다 불리해 보인다. 가장 큰 장애는 기득권이다. 23년 전 삼성엔 지킬 기득권이 많지 않았다. 지금은 가진 것이 너무 많다. 그래서 변하기가 더 어렵다. 노키아가 망한 것도 세계 1위의 기득권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23년 전 이 회장이 신경영을 성공시킨 데는 숨은 조연이 있었다. '몰래 카메라'다. 1993년 6월 삼성그룹 사내방송팀이 설치한 카메라에 충격적인 장면이 잡혔다. 생산 라인에 도착한 세탁기 뚜껑의 뒤틀림이 심해 아귀가 맞지 않았다. 당연히 불량품을 폐기한 뒤 새로 금형을 떠야 했다. 그런데 현장 직원의 대응이 수뇌부를 경악시켰다. 칼로 플라스틱을 깎아내더니 태연하게 그냥 조립하는 것이었다.
당시 프랑크푸르트에 머물던 이건희 회장에게도 테이프가 공수됐다. 이 회장 입에서 "지금껏 속았다"는 말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런데 처참한 실상을 목격한 순간 해결책도 따라 나왔다. 알고 보니 삼성은 더 잃을 게 없었다. 그러니 모든 걸 다 버리고 변할 수 있었다.
신경영의 성공 비결은 어찌 보면 단순했다. 톱이 현장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위에서 아무리 '품질 우선'이라며 노래를 불러도 품질은 좋아지지 않았다. 이 회장은 이유를 몰랐다. 그런데 몰카를 본 순간 수수께끼가 풀렸다. 경영진의 지시가 현장에선 무시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재용 부회장 역시 경영 일선에 나선 이후 실리콘밸리 스타일의 혁신을 주도해왔다. 자율 출퇴근제를 도입하고 반바지 출근까지 허용했다. 그러나 원하는 시간에 출퇴근하는 직원은 많지 않고, 반바지 입은 사람은 보기 어렵다. 삼성 임원들은 여전히 일사불란하게 새벽 6시 반에 출근한다. 그런데 그 밑의 부장·차장이 배짱 좋게 늑장 출근하기는 어렵다. 임원들은 죄다 정장 차림인데 반바지 입을 강심장은 없다.
삼성이 '스타트업 컬처'를 선포한 후 일부 직원 사이에 냉소적인 카톡이 오갔다고 한다. "혁신을 위한 보고서를 작성하고 수정에 수정을 거듭해야 할 것이다. 6월 혁신안 선포 때 중요한 것은 사장들 좌석 배치도와 식사 메뉴를 짜는 게 될 것이다. 야근과 보고를 줄이기 위한 야근과 보고가 늘 것이다…."
현장의 실상을 파악하지 못하면 혁신은 성공하지 못한다. 이 부회장에게도 아버지 같은 '세탁기 몰카'가 필요한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