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호텔전쟁
재벌가 딸들이 호텔을 두고 팽팽한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신격호 롯데그룹 총괄회장의 외손녀이자 신영자 롯데복지장학재단 이사장의 둘째 딸인 장선윤 롯데호텔 상무와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녀 이부진 신라호텔 사장이 그 주인공이다. 지난해 장 상무가 호텔로 복귀하면서 본격적인 대결의 서막이 올랐다.
이들은 요즘 비즈니스호텔 시장에서 한 치의 양보 없이 대격돌 중이다. ‘신라스테이’라는 브랜드로 비즈니스호텔 사업을 시작한 호텔신라는 2013년 경기도 동탄을 출발점으로 서울 역삼동, 서대문, 제주도 및 울산에 진출했다. 최근에는 마포, 광화문에도 두 곳을 추가로 열었다.
이러한 비즈니스호텔 시장에 뛰어든 건 롯데호텔이 먼저다. 지난 2009년 서울 마포 공덕동에 ‘롯데시티호텔 마포’를 오픈하면서다. 이어 김포공항, 제주 연동과 대전 유성구, 서울 구로와 명동 등 총 7개 호텔을 운영 중이며 가장 최근에는 ‘L7 명동’도 개장했다. 충무로에 위치한 L7 명동은 롯데호텔이 20~30대 젊은 해외 관광객을 타깃으로 새롭게 만든 스타일리시하고 감각적인 비즈니스호텔 브랜드다.
특히 지난해 6월에는 두 호텔이 울산에서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잇따라 오픈하는 ‘울산대첩’을 벌이기도 했다. 두 호텔 간의 거리는 8m에 불과하다.
이부진, 특유의 승부사 기질 앞세워
지난해에만 총 5개의 신라스테이를 개점한 이부진 사장. 이 같은 광폭행보에는 이부진 사장 특유의 승부사 기질이 깔려 있다는 게 호텔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지난해 이 사장은 ‘메르스’라는 초비상 사태에 발 빠르게 대응해 탁월한 위기관리 능력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고, 면세점 사업권도 획득하여 국내를 대표하는 여성 오너의 자존심을 세웠다.
지난 3월 11일 진행된 제43기 정기주주총회에서 이 사장은 “지난해는 글로벌 경기침체와 메르스로 인한 소비위축으로 어려운 한 해였지만 우리는 사상 최대 매출액인 3조2천5백17억원을 실현했다”고 밝혔다.
올해엔 더욱더 공격적인 행보에 나설 계획이다. 면세점으로 창출한 관광수익을 지역·지방과 공유해 위축된 관광 경기를 활성화시키겠다는 통 큰 포부를 밝히고 있다. 또한 중국 산시성 시안 가오신구에 호텔신라 브랜드를 내건 해외 진출도 검토하고 있어, 호텔사업의 해외 진출도 기대될 전망이다.
이 사장은 주총을 통해 “올해는 중국 증시의 하락과 환율, 북핵 이슈 등의 영향으로 불확실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면서 “회사가 중장기적인 비전과 성장을 지속적으로 이어나갈 수 있을지 가늠하는 중요한 한 해가 될 것이니만큼 지금까지 쌓아온 양적 성장과 질적 혁신을 바탕으로 올해를 건실 경영체제 확립의 해로 만들어나가겠다”고 다짐했다.
장선윤, 내실 다진 후 호텔 복귀 2년
롯데호텔과 면세점 등에서 근무했던 장 상무는 지난 2012년 재벌빵집 논란이 불거지자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지난 2014년 10월 롯데호텔에 재입사한 후 모친이 있는 롯데복지장학재단에 파견돼 조용히 아동복지사업을 펼쳐오다, 지난해 4월 해외사업개발 담당 상무로서 호텔사업에 복귀했다. 때문에 장 상무 역시 호텔사업에서 어떤 식으로든 경영능력을 과시할 가능성이 높다.
미국 하버드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장 상무는 지난 2007년부터 2008년까지 롯데호텔 마케팅부문장(상무)으로 일한 이력이 있다. 또, 과거 롯데백화점이 명품관 에비뉴엘을 열었을 때 해외 브랜드를 유치하는 데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복귀한 장선윤 상무가 롯데호텔 해외 진출 프로젝트 업무를 맡은 것으로 알려져 두 재벌가 딸들의 경쟁이 글로벌 무대로 확장될 전망이다.
삼성물산 패션부문 이서현 사장과 신세계인터내셔날 정유경 사장은 올해 패션사업 부문에서 본격적인 경쟁을 벌일 것으로 보인다. 두 사람 모두 올해 정기인사를 통해 패션부문에서의 역할이 확대됐기 때문이다. 이서현 사장은 제일기획 경영전략담당 자리에서 물러나고, 삼성물산 패션부문 경영기획담당에서 패션부문장으로 보직이 변경됐다. 그리고 정유경 부사장은 신세계백화점 총괄사장으로 승진했다. 정유경 사장이 패션사업 계열사인 신세계인터내셔날을 사업 초기부터 관여해온 데다 백화점사업과 패션사업의 시너지가 큰 만큼 정 사장의 역할이 더 확대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둘은 2014년 9월 영국의 패션 전문 온라인 매체인 이 발표한 ‘2014 세계 패션을 움직이는 500인’에 나란히 뽑히기도 했다. 이는 둘의 승부가 기대되는 이유 중 하나다.
이서현, 패션부문 전반 직접 진두지휘
지난해까지 패션부문 경영기획담당과 제일기획 경영전략담당을 병행하던 이 사장은 연말 인사에서 삼성물산 패션부문장 사장을 맡게 됐다. 향후 그룹 내 패션부문 전반을 직접 진두지휘하게 된 것인데, 2002년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입사한 이후 13년 만의 성과다.
특히 이 사장이 지난 3년간 손수 공을 들여온 SPA 브랜드 ‘에잇세컨즈(8Seconds)’가 하반기에 중국 진출을 앞두고 있는 만큼, 이 결과가 향후 그룹 내 입지나 경영능력 평가를 가름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이 사장은 서울예고와 미국 파슨스디자인학교를 졸업해 2002년 삼성물산 패션부문(구 제일모직) 패션연구소 부장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이후 2005년 상무로 승진했고, 2013년 패션부문 경영기획담당 사장직에 오르며 삼성그룹의 패션사업을 책임졌다. 특히 삼성패션디자인펀드를 통해 신진 디자이너를 육성하는 데 힘썼으며, 정구호(구호)와 정욱준(준지)을 영입하는 등 안팎으로 공을 세우기도 했다.
이 사장이 그간 그룹 내에서 패션분야에서만 실무를 쌓아온 만큼 국내 오너 경영인 가운데서는 ‘패션통’으로 통한다. 더욱이 올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이 합병해 새로운 삼성물산이 탄생하면서 패션부문의 실적 개선에 대한 기대가 높다.
정유경, 럭셔리사업 책임 막중
신세계백화점 총괄사장으로 승진한 정유경 신임 사장도 이 사장과 마찬가지로 디자인을 공부했다. 이화여대 응용미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로드아일랜드 디자인학교를 거쳤다. 1996년 조선호텔 마케팅담당 상무보로 입사했고, 2009년 어머니가 있는 신세계백화점으로 거처를 옮겨 다양한 활동을 주도했다.
전공을 바탕으로 패션사업에 힘을 기울였다. 패션 관련 계열사인 신세계인터내셔날의 브랜드 수입이나 론칭에 조언을 하기도 했다. 뉴욕, 밀라노, 파리 등 해외 셀러브리티들이 선호하는 감각적인 브랜드를 ‘분더샵’에 유치해 편집숍의 혁신을 주도했으며, 분더샵을 통해 선보인 제이멘델, 피에르 아르디, 사카이 등은 백화점 모노브랜드로 론칭됐다.
과거 화려한 전적이 있다 해도 2016년은 두 사람에게 ‘경영 시험대’가 될 수 있다. 오랜 기간 그룹 내 패션사업에 영향력을 끼쳐왔으나 단독으로 경영 전반을 총괄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Past
자주 비교선상에 오르는 여성 CEO들이다. 이름과 나이, 재벌가 딸이라는 성장배경까지 비슷해서다. 두 사람은 삼성과 동양 그룹을 일군 창업주의 후손들이다. 선대인 이병철, 이양구 창업주는 1954년 제일제당 설탕을 함께 판매하며 사업을 키운 동업자다.
이미경 부회장과 이화경 사장은 미디어업계의 대표적인 라이벌이다. 그동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치열한 승부를 벌여왔다.
한때 설탕사업으로 손을 맞잡았던 이병철, 이양구 창업주는 삼척시멘트 인수 문제로 갈등을 일으켜 결국 결별 수순을 밟았다. 이후 삼성과 동양은 각각 계열사 CJ와 오리온으로 분리됐다. 그리고 이미경 부회장과 이화경 부회장이 경영 전면에 나선 후 본격적인 ‘미디어 여걸들의 전쟁’이 시작됐다.
사업 초기, 둘은 각각의 분야에서 경쟁력을 보였다. 영화 투자와 흥행, 그리고 영화관 사업 면에서는 CJ가 우세했고 케이블TV 분야에서는 오리온이 앞섰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미경 부회장의 CJ미디어가 엠넷·KMTV 등 음악과 음식 분야에 강하긴 했지만, 이화경 부회장의 온미디어가 가지고 있던 투니버스·OCN·온스타일 등의 케이블TV 채널들이 시청률 1위를 사수했기 때문이다. 이후 반격에 나선 이미경 부회장은 신작 영화를 한 편이라도 더 먼저 방송하기 위해 거액을 투자하는 등 공격적인 행보를 보였고, 얼마 후 승부가 뒤집혔다.
2009년에 들어서며 온디미어가 매출 면에서 CJ미디어에 밀리기 시작했다. 막대한 투자 재원을 마련하기 힘들 것이라 판단한 이화경 부회장은 급기야 온미디어를 매각하기로 결정했는데, 당시 온미디어 사냥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은 다름 아닌 이미경 부회장이었다. 결국 온미디어는 CJ 품에 안겼다. 겉으로 보기엔 이미경 부회장의 한판승. 그러나 업계에서는 다른 시각도 있었다. 이 부회장이 온미디어의 실제 가치보다 훨씬 높은 가격을 지불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로부터 7년 후 통 큰 투자를 했던 이미경 부회장은 17개의 채널과 시장점유율 31.9%에 달하는 국내 최대 케이블채널 보유 회사를 탄생시키며 최후의 승자가 됐다.
재계 경쟁구도는 돌고 돈다. 언제, 누구와 어느 시장에서 붙을지 모른다. 지금은 삼성물산 패션부문으로 자리를 옮겼지만 한때 이서현 사장은 제일기획 부사장이었다. 1973년 설립 이후 1위 자리를 철옹성처럼 지키던 제일기획이 뜻하지 않은 복병의 등장에 다소 흔들린 적이 있다.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의 맏딸 정성이 고문이 있는 이노션이 도전장을 내밀었기 때문. 업계 1위를 고수하던 제일기획의 뒤를 이노션이 바짝 따라붙기 시작한 것이다.
이노션은 설립 이후 50% 이상의 급격한 성장세를 지속하면서 출범 3년 만인 2008년 국내 2위 광고사 자리에 올라섰다. 그동안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었던 부동의 1위 제일기획을 위협하는 경쟁사로 성장한 것이다.
정 고문의 직함은 고문이지만 27.99%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어 최대주주이기도 하다. 이노션 측은 “정성이 고문은 경영에 직접 관여하고 있지 않지만 회사의 비전, 인재 영입은 물론 주요 광고도 꼼꼼히 챙겨 본다”고 말했다.
현재까지도 이노션은 국내 2위의 광고대행사다. 이서현 vs. 정성이 광고전쟁 구도에서 승자는 이서현이었던 셈. 제일기획의 2015년 매출은 2조8천67억원으로 9천8백79억원인 이노션보다 3배가량 크다.
그러나 안심하기는 이르다. 성장속도는 이노션이 압도적이다. 제일기획의 2015년 매출은 전년 대비 5.3% 늘어난 반면 이노션은 32.7%나 늘었다.
한편, 지난해 재벌가 여성 중 주식시장의 승자는 정성이 이노션 고문이었다. 현대차 계열 광고사인 이노션이 지난 7월 상장하면서 빚어진 결과다. 이노션의 주식 27.99%를 갖고 있는 정 고문의 주식평가액이 4천98억원으로 치솟으며 올 한 해 지분가치가 가장 크게 뛴 주주가 됐다.
정성이 고문은 재벌가 여성치고는 특이한 이력을 가졌다. 지난 1985년 9월, 선두훈 대전선병원 이사장과 결혼한 후 약 20년간 전업주부로 지냈다는 점이다. 2003년 정몽구 회장의 부름으로 해비치호텔앤드리조트 이사를 맡은 게 첫 사회생활이었다. 오랜 기간 전업주부로 생활한 덕분인지 여직원들의 출산과 육아 등 여성복지에 큰 공을 들이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직원들로부터 허물없고 소탈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재계 3세와 4세들의 경영 참여가 가시화되고 있는 가운데, 업계에서 사실상 ‘숨은 실세’라 평가되고 있는 ‘왕여사’들이 있다. 이들은 작고하거나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창업주의 부인이자 회장의 어머니들이다. 한 재계 관계자는 “이들은 평소에 얼굴을 비추진 않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막강한 입김을 낸다”면서 “창업 초기부터 죽 지켜봐온 노하우로 아들들에게 경영에 관한 조언을 하거나 기업 리스크를 줄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CJ그룹의 경우 형제간 분쟁 없이 CJ그룹은 이재현 회장, 엔터테인먼트는 이미경 부회장, 재산커뮤니케이션즈는 이재환 대표가 경영하게 됐던 건 손복남 고문(이재현의 어머니)의 교통정리 덕”이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이 관계자는 이어 “올해 86세인 사조산업의 이일향 이사 또한 15년간 이사회 멤버로 활동하면서 경영에 관여하고 있다”고 전했다.
유업계 대표 라이벌 기업의 사모님들이다. 매일유업의 고 김복용 창업주의 아내인 김인순 명예회장(81)과 남양유업 고 홍두영 창업주의 아내 지송죽 이사(87). 이 둘은 올해도 초고령 등기이사에 이름을 올릴 예정이다. 이들은 창업주에 이은 2세 경영의 조력자로 나서면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