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생은 살해당한 현장에 장갑을 남겨뒀다. 한 켤레 장갑 속에 동생의 손이 들어 있는 듯, 장갑이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장갑은 유력한 증거물이 됐다. 동생이 마지막 순간에 장갑을 예술 작품 형태로 남기면서 범인을 체포하도록 도왔다고 생각한다."

재미교포 작가 존 차(한국명 차학성·71)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가 영어로 쓴 소설 '안녕, 테레사'가 최근 문학세계사에서 나왔다. 여동생의 원혼을 위로하는 제망매가(祭亡妹歌)다.

시인·소설가 문형렬(61)이 우리말로 번역했다. 문형렬은 1982년과 198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서 각각 시와 소설에 당선했고, 소설 '바다로 가는 자전거' 등을 발표했다. 존 차가 그의 소설을 영어로 번역해 깊은 인연을 맺어왔기에 그는 '안녕, 테레사'가 미국에서 출간되기도 전에 우리말로 옮겼다.

실화 소설 ‘안녕, 테레사’를 쓴 존 차(오른쪽)와 우리말 번역가 문형렬.

존 차의 여동생은 재미교포 예술가 테레사 차(한국명 차학경)였다. 1982년 미국 뉴욕의 한 빌딩 지하실에서 목이 졸려 살해됐다. 범인은 그 건물의 관리인이었고, 연쇄 성폭행 전과자였다. 테레사 차는 서른한 살에 비극적 죽음을 맞기 전까지 시인이자 소설가였고, 퍼포먼스와 비디오 아트에 걸쳐 활동해 한국인의 다층적 정체성을 표현한 전위 미술가였다. 2003년 국내에서 회고전이 열리기도 했다.

존 차는 원래 해양 플랜트 건축 엔지니어였지만, 동생의 죽음 이후 글을 쓰기 시작했고, 한국 소설을 영어로 번역해 문예진흥원 번역상과 펜문학 번역상을 받았다. 그는 차마 말도 꺼내기 싫었던 동생의 최후를 생각하며 20년 동안 원고를 다듬어 '안녕, 테레사'를 써냈다. 사건 발생부터 5년에 걸친 지루한 재판 과정을 사실적으로 담은 실화 소설이다. 그는 "동생과 우리 가족이 겪은 비극을 독자들에게 더 생생하게 전하기 위해 소설 형식을 취했다"라고 밝혔다.

존 차는 '안녕, 테레사'를 통해 동생의 원혼이 유족의 꿈에 나타나 범인을 잡도록 한 일을 밝혔다. 뉴욕 경찰이 살해범을 잡았지만, 범행 현장을 제대로 수사하지 못해 증거 불충분으로 범인이 풀려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사건 발생 보름이 지난 뒤 테레사 차의 어머니가 꿈에서 딸을 봤다고 했다. 딸은 '710'이란 숫자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여기! 거기가 아니고 여기야"라고 되풀이했다는 것. 유족은 경찰과 함께 사건이 난 건물 구석구석을 뒤졌다가 지하 2층에서 숫자 710이 적힌 기둥을 찾아냈다. 피살자의 장갑과 부츠 한짝도 발견됐다. 수사가 다시 시작됐고, 3심까지 가는 법정 공방 끝에 범인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존 차는 "도저히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라며 "동생의 넋이 분명히 어머니의 꿈에 나타났다고 생각한다"고 회상했다. 문형렬은 "테레사 차는 한국인도 미국인도 아닌 디아스포라(유랑민)의 눈으로 인간 존재와 언어를 독특하게 다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