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때 미국 정부 관리를 만나 '미스터 ○○'했더니 "내 아버지를 부르는 것처럼 들리니 그냥 이름을 불러 달라"고 했다. 미국에선 처음 인사 나눈 후엔 대개 서로 이름을 부른다. 존댓말 문화에 익숙한 우리 입장에선 낯설다. 그런데 이름만 부르니 대화의 내용과 질이 달라졌다. "차관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와 "데이비드, 넌 어떻게 생각해?"는 완전히 다른 대화다. 거리감이 좁혀지고 눈높이가 달라졌다.
▶한국계 미국인 김용 세계은행 총재는 2012년 취임식 때 직원들에게 자신을 미국 이름 '짐(Jim)'으로 불러 달라고 했다. 은행 안에서 일할 땐 '김 총재님'이나 '김 박사님'이 아니라 친구처럼 이름을 부르라고 한 것이다. 그런 김 총재가 한국의 박재완 기획재정부 장관을 만났을 땐 한국말로 "선배님, 앞으로 잘 부탁해요"라고 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과 단둘이 있을 때도 '선배님'이라 부른다. 문화에 따라 친근감과 격의 없는 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호칭이 무엇인지 아는 것이다.
▶CJ는 2000년부터 '부장님' '과장님' 대신 이름 뒤에 '님'자를 붙였다. 처음엔 다들 어색해했다. 한 임원은 "딸 같은 비서가 갑자기 이름을 부르니 적응이 안 되더라"고 했다. 젊은 직원들 반응은 좋은 편이었다. 호칭만 바꿨을 뿐인데 존중받는 느낌이라고 했다. SK는 과장·차장·부장 대신 이름 뒤에 '매니저'나 'PL(프로젝트 리더)'을 붙여 부른다. 제일기획은 평사원에서 사장까지 모두 이름 뒤에 '프로'란 호칭을 쓴다. 카카오는 각자 '대니얼' '니콜' 등 영어 이름을 지어 부른다.
▶삼성전자도 '님'이나 '프로'같은 호칭을 사용할 계획이라고 한다. 윗사람 눈치 보는 문화로는 세계 1등 기업을 유지하기 어렵다는 판단 때문이다. '사원-대리-과장-차장-부장' 5단계 직급도 줄여 의사 결정 단계를 간소화한다.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처럼 창의적인 IT(정보기술) 기업으로 변신하기 위해 조직 문화부터 바꿔 보겠다는 것이다.
▶2002년 월드컵 때 히딩크 감독의 성공 비결 중 하나가 평소 선수들이 선후배 가리지 않고 서로 이름을 부르게 한 것이었다. 경기 중 긴박한 상황에선 간단히 이름만 부르는 게 더 효과적이다. 호칭 바꾼다고 당장 수직적 문화가 수평적으로 변하진 않을 것이다. 실리콘밸리에선 최고 경영자가 평사원들과 자주 만나 주요 현안과 성과를 공유한다. 거기서 인턴사원 의견이 반영되는 경우도 있다. 호칭 파괴가 실험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그 정도의 원활한 소통이 가능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