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대 러시아학과 3학년 윤재영(24)씨는 1학년 때부터 비싸고 무거운 노어(露語) 사전 대신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 사전을 주로 사용했다. 윤씨는 "1만원 내외로 다운받을 수 있는 앱 사전이 유용했지만 우리말 표제어들이 어딘가 이상했다"고 말했다. '당(黨) 세포' '계급적 착취' '혁명가적 품성' 같은 어휘들이 사전에 많이 있었고, '이발' 대신 '리발', '요리' 대신 '료리'식으로 두음법칙을 무시한 표기도 있었다. 한국어가 아닌 북한어였다.

북한에서 출간된 조선어―러시아어 사전(조러사전)이나 러조사전을 앱 형태로 이용하는 한국 이용자들이 늘고 있다. 표기법이나 어휘 면에서 우리 표준어와 차이가 있지만, 앱으로 쉽게 다운받을 수 있고 표제어가 풍부해 한러 또는 러한사전보다 선호하는 경우도 있다. 대학생 윤씨는 "러시아어 단어의 뜻을 5초 만에 찾을 수 있기 때문에 전공 수업에서 많은 학생이 쓰고 있다"고 말했다. 조러·러조사전을 수록한 사전 앱 'KoRusDic'을 2010년부터 유료 판매한 조모(28)씨는 "지금까지 약 1만명이 다운로드했다"고 말했다.

그래픽= 김성규

한국에서 북한의 러시아어 사전이 쓰이게 된 것은 한국 사전의 부족한 개정 작업과 늦은 디지털화다. 1987년 11만 단어 규모로 출판된 한국의 첫 러한사전은 지금까지도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종이 사전이지만 30년 가까이 한 번도 개정판이 나오지 않았다. 활자로 찍은 사전인 데다가 디지털화하고 개정판을 내기엔 시장이 너무 작기 때문이다. 러시아어 사전을 판매하고 있는 도서출판 문예림 측은 "현재 가장 많이 보는 전공자용 러한사전의 판매 부수가 한 해 500부 남짓"이라며 "큰돈을 들여 개정판을 내거나 디지털화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반면 러시아의 전통적 우방국이었던 북한에선 1976년에 이미 15만 단어를 수록한 조러사전이 나왔고, 1990년대엔 디지털 작업을 거쳐 개정판이 나오기 시작했다. 최근 제작된 러시아어 사전 앱들은 대부분 북한의 이 디지털 정보를 주된 내용으로 담고 있다. 'KoRusDic' 앱에는 표제어 40만개가 수록돼 있다. 이 앱을 출시한 조씨는 "사전 내용의 정확한 출처를 밝히긴 곤란하지만 인터넷에 무료로 공개돼 있는 북한 자료를 많이 활용했다"고 말했다.

북한어를 가지고 만든 사전이다 보니 한국인에겐 생경한 표현이 많다. 앱 사전에서 '미국'을 검색하면 '미국놈'이란 연관 표제어가 같이 뜬다. '미국놈'은 러시아어 'янки'로 번역돼 있는데, 이 단어의 발음은 '양키'다. 또 공산주의 사상과 관련이 깊은 개념의 단어들도 많다. 일례로 검색창에 '혁명'을 치면 '혁명가'부터 '혁명적 폭력'까지 관련 단어 99개가 같이 나온다. 2000년대 중반 북한에서 중·고교를 다니며 러시아어를 제1외국어로 배운 탈북자 조모(26)씨는 "중학교 1학년 때 러시아어로 처음 배운 문장이 '경애하는 수령 김정일 원수님 고맙습니다'였다"며 "북에선 외국어 교육에서도 사상성을 강조한다"고 말했다.

북한의 러시아어 사전엔 전문 용어가 많이 수록돼 있다. 러시아어가 공용어인 벨라루스에 6년간 화학 전공으로 유학한 윤원영(29)씨는 "'가성 알칼리'나 '접촉작용' 등 한국 러시아어 사전엔 없는 전문 화학용어들이 북한의 러시아어 사전에는 독립된 표제어로 수록돼 유학 시절 많은 도움이 됐다"며 "이공 계통으로 러시아에서 일하거나 유학하려는 사람들에게 북한 사전은 필수품"이라고 했다. 또 군사 용어가 많아 "러시아 전쟁 영화를 볼 때 유용했다"는 학생들도 있다. 장실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북한은 러시아와 합작해 사전을 만들어왔기 때문에 지질·생물학 등 기초 과학 분야에 충실한 러시아 사전의 성향이 녹아 있다"고 말했다.

러시아어 전공생들이 북한 사전을 보는 것에 대해 언어 전문가들은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 관계자는 "'소행' '접대' 등의 단어는 한국에서 주로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지만 북한에서는 '아름다운 소행' '친절한 접대' 등 긍정적으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며 "언뜻 보기에 비슷하다고 구분 없이 통·번역하면 큰 실수를 범할 수 있다"고 말했다. 한 러시아어 교수는 "북한 사전에 표제어는 많을지 몰라도 예문이 부실해 학술적 가치는 떨어진다"고 평하기도 했다. 추석훈 한국외대 러시아학과 교수는 "늦어도 내년에는 역대 최다 표제어를 갖춘 러한사전을 외대에서 출간할 예정"이라며 "학생들의 편의를 위해 앱 형태로도 제작할 것"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