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제왕적 총재' 시절 김영삼(YS)·김대중(DJ)은 대리인을 내세워 당을 관리하곤 했다. 대통령 되기 전에는 직할 통치를 했지만 정권을 잡은 뒤엔 이홍구·이수성(YS), 서영훈·이만섭(DJ) 같은 사람을 당 대표 삼아 '위성 통치'를 했다. 그 사람이 권한을 일부 위임받은 관리자인지, 그야말로 '바지사장'이나 '얼굴마담'인지는 전적으로 YS·DJ 뜻에 달렸었다.

▶1985년 12대 총선 때 이민우 총재의 신민당은 민한당을 밀어내고 제 1 야당 자리를 차지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여세를 몰아 1986년 말 여당 민정당이 요구하던 내각제 개헌을 수용하는 이른바 '이민우 구상'을 시도했다. 그러다 소속 의원 대부분이 탈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민우는 대통령 꿈에 부풀어 있던 당의 오너 YS·DJ의 뜻을 거스른 죄로 1년 뒤 쓸쓸하게 정계를 떠났다.

▶YS·DJ 시대가 끝나면서 함께 사라졌던 '바지사장'이라는 말이 다시 정계에 등장했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대표가 "안철수 빼고 다 오라"고 통합을 제안하자 화난 안철수 대표가 "임시 사장이…"라고 되받았다. '…주제에'라는 뒷말은 참았을 것이다. 며칠 전 국민의당에 들어간 박지원 의원도 "임시대표부"라는 표현을 썼다. 국민의당에선 "선거만 끝나면 훅 날아갈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더민주당은 친노(親盧)와 운동권의 정당이다. 똘똘 뭉치면 대선 후보 같은 자리를 언제든 거머쥘 수 있지만 특유의 폐쇄성 때문에 정작 본선에 나가면 연전연패했다. 탈당한 사람들은 이것을 '친노 패권주의' '만능 2등 야당'이라 했다. 이 당의 오너 같은 존재 문재인 전 대표가 1월 말 전권(全權)을 약속하며 김종인을 영입했을 때 다들 이렇게 생각했다. 부도 직전 정당을 맡은 위탁 관리인일 뿐, 4·13 총선 이튿날 역할이 끝날 것이라고.

▶그런데 다른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자칭 '대장 체질' 김 대표가 한 달여 만에 칼로 자르듯 친노 핵심 일부를 쳐낸 자리에 전문가 그룹을 채워넣고, '성역' 햇볕정책까지 비판하고, 국민의당을 압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다. 총선 이후는 물론 대선이라고 못 치를 것 없지 않냐는 얘기들이다. 그의 입은 거침없다. 처음엔 목표 의석으로 110석을 내세우더니 어제는 '과반'을 거론했다. "지금 야당에 대통령감이 없는데 문재인도 마찬가지"라는 말까지 했다. 문 전 대표와의 교감 속에서 이뤄지는 일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미 위탁관리인 수준을 한참 넘어섰다. 지금 가장 궁금한 것은 문 전 대표의 심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