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야(與野)는 29일에도 4·13 총선 선거구 획정안이 담긴 공직선거법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에서 처리하지 못했다. 지난 1월 1일부터 선거구가 무효가 된 '무법(無法)·위헌(違憲) 상태'가 발생한 지 60일이 됐지만 아직 이를 해소하지 못한 것이다. 19대 국회는 마지막까지 최악의 모습을 보이고 있다.

◇선거구 위헌 상태 두 달째 방치

여야는 지난 23일 양당 대표가 선거구 획정 기준에 늑장 합의하면서 획정안이 담긴 선거법을 당초 26일 처리하기로 했었다. 하지만 정의화 국회의장이 23일 테러방지법을 직권 상정하자 더불어민주당이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에 돌입하면서 국회는 마비됐고 이 상황이 29일까지 계속됐다. 여야가 선거법을 처리하지 못해 선거구가 없는 무법 상태를 두 달째 방치하자 정치권의 무책임에 대한 비판이 쏟아졌다.

29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국민의당 최원식 의원이 테러방지법 직권상정에 반대하며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장을 지낸 이정희 한국외국어대 교수는 "국회가 협상과 타협 능력을 상실한 채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며 "정치권을 향한 국민 저항 운동이 나올 수 있는 지경"이라고 했다. 이내영 고려대 교수는 "선거법을 다른 쟁점 법안에 연계한 여당도, 법안 발목 잡기 관행을 보인 야당도 모두 책임이 있다"고 했다. 선거구 획정이 늦어지는 것은 현역 의원들의 정치적 이기심이 작동한 때문이라는 지적도 나왔다. 홍득표 인하대 교수는 "선거구 획정이 늦어져도 현역 의원들은 손해 볼 게 없으니 급할 게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는 것"이라며 "정치인들이 자기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이기심 때문에 국민과 법은 내팽개치고 있다"고 했다.

선거법 처리가 더 늦어지면 '총선 연기론'이 현실화할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또 총선이 치러진 이후 소송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박원호 서울대 교수는 "총선이 끝나면 '(선거구 획정이 늦게 돼) 선거운동을 충분히 하지 못했기 때문에 선거에서 졌다'는 소송이 엄청나게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중앙선관위 관계자도 "근소한 표차로 당락이 결정될 경우 선거 무효 소송 등 다수의 법적 분쟁이 발생할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테러 위협 앞에서도 테러방지법 공방만

테러방지법 처리가 막혀 있는 데 대한 우려도 많다. 북한이 핵 도발에 이어 '청와대 직접 타격'까지 위협하면서 테러 가능성이 높아지는 상황인데도 여야는 각자 입장만 내세우고 있다. 더민주는 국정원에 과도한 권한을 줄 수 없다는 이유로 독소 조항 수정 없이는 합의할 수 없다는 태도다. 더민주는 구체적으로 통신 제한 조치 요건에 '국가 안전 보장에 위험이 예상되는 경우'와 '테러 방지를 위해 필요한 경우'를 함께 규정하는 것, 개인 정보와 위치 정보 요구권, 조사권·추적권 등은 대테러 센터로 이관할 것 등을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은 "이미 야당의 요구가 법안에 반영돼 있기 때문에 추가 수정은 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이내영 교수는 "지금 테러방지법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미 국민 여론에서 확인된 것"이라며 "여당이 야당의 우려 사항을 수용하든 아니면 야당이 양보하든 빨리 통과시켜야 한다"고 했다. 홍득표 교수는 "정치인들이 정파적 이해만 생각하다 보니 테러방지법처럼 시급한 현안에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경제 위기 앞에서도 민생 법안 외면

이뿐 아니라 경제 위기가 심각한데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과 노동 개혁 4법 등 경제활성화법 관련 논의 역시 한 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서비스법과 노동 개혁법이 통과되면 106만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으로 예상했다. 서비스법은 국회에 발의된 지 1300일, 노동 4법은 160일을 넘긴 채 관련 상임위에서 계류 중이다. 경제 단체들은 경제 활성화 법안 입법 촉구 서명운동을 벌이며 "국회가 경제 활성화 법안 입법에 힘을 모아 달라"고 했지만, 오히려 2월 임시국회에서는 여야 정쟁(政爭)에 막혀 제대로 된 논의조차 없었다.

여권의 한 관계자는 "선거가 다가오면서 경제활성화법 관련 논의는 쏙 들어가버렸다"며 "결국 의원들이 자기 기득권 지키기에 혈안이 돼 당장 자신들과 관련 없는 법안들의 처리는 미루는 게 아니겠느냐"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