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에서 임시정부가 탄생되고, 임시정부가 전(全)민족적인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 기관 형태로 출현했다는 것은 망각할 수 없는 것이다."(엄항섭 임정 선전부장)

"일본의 문화정책에 흡수된 우파들은 3·1 정신의 계승자가 될 수 없고, 계급투쟁을 전개한 좌파들이 진정한 3·1운동의 계승자이다."(김오성 민주주의민족전선 선전부장)

광복 후 처음 맞는 3·1절인 1946년 3월 1일을 앞두고 좌·우파가 계승 문제를 놓고 격돌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신탁통치안에 대한 반대(우파)와 찬성(좌파)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대립하던 양쪽은 3·1절 기념행사를 통해 새로 세워지는 나라의 역사적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해 한판 대결을 벌였다.

1946년 3월 1일자 조선일보 1면. 광복 후 처음 3·1절을 맞아 대대적인 특집을 마련했다. 3·1운동의 결실로 탄생한 대한민국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경축사와 엄항섭 선전부장의 3·1운동론 등이 실렸다.

박명수 서울신학대 교수(한국기독교사)는 3월 말 현대기독교역사연구소 제20회 영익기념강좌에서 발표할 '1946년 3·1절: 해방 후 첫 번째 역사전쟁' 논문을 통해 좌·우파의 1946년 3·1절 기념행사 준비 과정과 역사 논쟁, 기념행사 개최 결과, 역사적 의미 등을 추적한다.

해방 정국의 주도권과 관련,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를 놓고 상반된 입장을 보이던 좌·우파는 각각 3·1절 기념행사 준비에 들어갔다. 우파는 1946년 1월 29일 3·1운동의 주역이었던 종교계와 정당, 청년·부녀 단체들이 참여하여 '기미독립선언전국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승만·김구를 명예회장, 신익희를 회장으로 추대했다. 이어 2월 14일 미 군정의 자문 기구로 출범한 민주의원은 3·1절 기념행사의 전국적 개최를 건의했고, 미 군정은 이에 호응하여 3·1절을 국경일로 지정했다. 그때까지 3·1운동에 대해 모호한 입장을 보이던 좌파는 우파의 적극적 움직임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 주도로 '3·1기념전국준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들은 좌파가 우세한 언론·문화예술계를 동원하며 3·1절 기념행사의 좌·우 공동 주최를 요구했다. 하지만 명분과 세력에서 우위를 보였던 우파는 좌파의 물타기 전술에 말려들지 않았고, 결국 좌·우파가 따로 기념행사를 갖게 됐다.

서울 종로 보신각 앞에서 열린 민주의원 주최 '제27회 독립선언 기념식'에는 이승만·김구·김규식 등 우파 정치 지도자와 미 군정 최고 책임자, 3·1운동 민족 대표 오세창·권동진 등이 참석했다. 이어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된 우파의 3·1절 기념 시민대회에는 10만~20만명이 참가해서 동대문에서 광화문을 거쳐 남대문까지 가두행진을 벌였다. 한편 탑골공원에서 열린 민전 주최 3·1절 기념행사에는 좌파 정치 지도자인 여운형·박헌영은 불참하고 이강국·허헌·이여성 등이 주도했다. 이어 남산공원에서 개최된 좌파의 시민대회는 약 1만5000명이 참석했다. 당초 예상보다 행사 규모가 크게 줄어들자 이들은 예정했던 가두행진을 포기했다.

박명수 교수는 "3·1운동과 임시정부의 계승을 주장한 우파와 달리 좌파는 일제하의 공산주의 운동에 정통성을 두었는데 3·1절에 대한 대중의 열기가 높자 이에 편승하려 했지만 결국 실패했다"며 "1946년 3·1절 역사 전쟁에서 패배한 좌파는 더 이상 3·1운동 계승을 주장하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