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문 특파원

24일 오후 인도 수도 뉴델리 북부 델리대학 인근 기숙촌에 급수차가 오자 주민 수백명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호스로 물을 받기 시작했다. 대형 고무통을 들고 온 비크람 고얄(24)씨는 "하루에 1~2번밖에 급수차가 오지 않아 물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며 "주민들이 돈을 모아 1000L에 2000루피(3만6000원)를 주고 사설 용수 업체를 불렀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현재 뉴델리시는 심각한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뉴델리 시민 1700만명 중 1000만명이 물이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다. 뉴델리시 측이 급수차량 140여대를 이용해 임시로 물을 공급하고 있지만,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뉴델리의 물 부족 사태는 최근 도시 북부 하리아나주(州)에서 카스트의 중간층인 '자트' 계급 시민들이 "천민 수드라에 비해 역차별을 받고 있다"며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벌어졌다. 자트는 브라만(성직자), 크샤트리아(군인), 바이샤(평민), 수드라(천민) 등으로 구분되는 인도의 전통적 신분제도인 카스트 위계에서 셋째 계급인 바이샤에 속한다. 시위가 벌어진 하리아나주 주민 2535만명 중 25%가 자트 계급이다.

인도는 1950년 공식적으로 카스트 제도를 철폐했다. 하지만 신분에 따른 사회·경제적 차별이 계속되자 하층민(수드라 및 카스트에 포함되지 않는 불가촉천민) 우대 정책을 마련했다. 인구의 50%에 이르는 하층민을 배려해 공무원 선발과 대학 입학에서 전체 정원의 25% 안팎을 무조건 이들에게 할당하도록 의무화했다.

물통 들고 급수차로 몰려든 시민들 - 지난 22일(현지 시각) 인도 뉴델리 시민들이 급수차로 몰려와 호수로 물을 받고 있다. 인도 하리아나주(州)에선 지난 10여일간 전통 카스트 계급 제도에서 중간층에 해당되는 ‘자트’가 공무원 선발과 대학 입시 때 하층민에게 할당 혜택을 주는 제도에 반대하며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그 과정에서 19명이 숨졌다. 시위 사태는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지만, 시위 도중 뉴델리에 물을 공급하는 운하가 파괴돼 뉴델리 시민 1000만명이 식수난을 겪고 있다.

['카스트 시위 19명 사망'...인도는 현재]

[[키워드 정보] 인도 전통적 신분제도인 카스트제도란?]

이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외됐다고 느낀 바이샤 계급의 자트들이 지난 15일부터 거리로 몰려나와 "우리에게도 같은 혜택을 달라" "차라리 최하층인 수드라로 계급을 낮춰달라"고 요구했다. 이들은 지난 10여일간 가정집과 기차역에 불을 지르고 하리아나주의 고속도로까지 점거하며 폭동을 일으켰다. 상점 500여곳과 차량 1200여대가 불탔다. 무장 군인을 동원해 벽돌을 던지며 맞서는 시위대를 해산하는 과정에서 19명이 숨지고 200명 넘게 다쳤다. 이날 뉴델리에서 북부 하리아나주로 뻗은 1번 고속국도를 타고 30km 정도를 달리자, 불에 탄 트럭과 버스가 눈에 들어왔다.

"함부키 래빙게, 다이 덤네비 바이세이 마랭게!(우리를 계속 굶주리게 하면, 당신들 역시 목말라 죽을 것이다)" 지난 19일에는 시위대 수천명이 하리아나주 토종 말로 구호를 외치며 뉴델리로 연결되는 무나크(Munak) 수로를 장악해 물 공급을 차단했다. 뉴델리 수돗물의 45%를 담당하는 이 수로가 차단되자 물 부족 사태가 벌어졌다. 인도 일간 타임스오브인디아는 "군대가 22일 수로를 다시 접수했지만 파괴된 시설을 수리하는 데 시간이 걸려 물 공급이 완전히 정상화되기까지 최대 2주가 걸릴 수 있다"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번 시위에 대해 "인도 사회의 독특한 약자 보호 정책이 만든 모순이 중산층 일자리 경쟁과 만나 발생한 현상"이라고 보도했다. 이건준 델리대 겸임교수는 "인도의 하층민 우대 정책은 하층민들의 사회 진출을 늘리는 긍정적 측면이 있는 반면, 개인 능력과 집안 형편을 고려하지 않고 일률적으로 적용해 카스트 상위 계급으로부터 역차별 논란이 끊임없이 일고 있다"고 했다. 지난해 8월 서부 구자라트주에서도 하층민 우대 정책에 반발하는 중상위 카스트 계급의 시위로 9명이 사망했다. 자트 계급인 시두 옴 프라카시(29)씨는 "아들을 농사일 대신 대학에 보내려고 해도 하층민 입학 할당제 때문에 하늘의 별 따기"라며 "하층민 학생들은 우리 아이들보다 입시 점수가 30점 낮아도 대학에 쉽게 들어가고 공무원도 될 수 있다"고 했다.

타임스오브인디아는 "집권당인 인도국민당(BJP), 주정부 등이 자트 계급과 협상을 벌여 소요 사태는 진정 국면으로 접어들었다"며 "BJP는 자트에게 수드라와 같은 혜택을 부여하는 법안을 발의할 예정"이라고 보도했다. 이에 대한 비판적 견해도 있다. 수린더 조드카 자와할랄네루대 교수는 "전통적으로 땅을 소유하고 농업에 종사해 중간층을 형성하는 자트 계급이 하층민인 수드라와 사정이 비슷하다고 보긴 어렵다"고 했다.

자트 계급은 1990년대 초부터 하층민에게 혜택을 주는 정책에 반대하는 시위를 수차례 벌였다. 모디 총리는 지난 2014년 자트에게도 하층민 우대책을 적용하려 했으나 대법원의 위헌 판결로 좌절된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