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전 지방 어느 고교 졸업식에서였다. 학교 재단 이사장이 축사를 하는데 마이크 상태가 좋지 않았다. 이사장은 마이크와 함께 축사 원고를 제쳐 놓더니 육성으로 즉석연설을 했다. "이번 졸업생 중에 서울대·연세대·고려대에 합격한 학생이 ○○명이다. 작년보다 ○○% 늘었다. 이 SKY 입학생들이 성장해 우리 학교를 빛낼 것이다." 20년도 더 지난 일이지만 그때 낭패스럽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비슷한 일이 며칠 전 서울 강남의 은광여고에서 벌어졌다. 이 학교 이사장은 졸업식 축사에서 "작년, 재작년만 해도 서울대와 연세대·고려대·이대·숙대에 간 학생이 50~ 70%에 달했는데 올해는 여기서 3분의 1도 안 된다"고 했다. 그는 "선생님들이 잘못 가르친 탓이냐. 졸업생들에게 정말 실망했다"고 말했다. 숙대보다 좋은 대학을 갔든 그렇지 않든 그 말을 들은 졸업생과 학부모·교사들이 어떤 심정이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졸업식은 새 출발선에 선 젊음들을 격려하고 충고하는 자리이기에 '마지막 수업'이라고 부른다. 거기서 축사를 준비하는 사람은 부담이 크다. 사회로 나가는 졸업생의 불안과 설렘을 감안해야 하고 뭔가 삶의 혜안(慧眼)을 깨우쳐줘야 한다는 욕심이 앞서기 때문이다. 스티브 잡스가 2005년 스탠퍼드대 졸업식에서 한 축사는 간명한 표현에 긴 뜻을 담아 돋보였다. "늘 갈망하라. 늘 우직하라(Stay Hungry, Stay Foolish)."
▶지난해엔 배우 로버트 드 니로가 뉴욕 어느 예술대 졸업생들 앞에서 "너희는 X됐다(you're fucked)"고 속어 축사를 했다. 사회로 나가 겪을 숱한 퇴짜의 시련을 각오하라. 굴하지 말고 꿋꿋이 '다음번(Next)'을 외치며 나아가라는 응원이었다. 이 정도 명연설을 못할 바엔 졸업생들이 잠시 웃을 수 있는 유머 감각을 발휘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은광여고 졸업생 중에 아직 합격 통보를 받지 못했거나 마음에 둔 대학에 붙지 못한 학생이 더 많았을 것이다. ▷기사 더 보기
해마다 5, 6월이 되면 미국 전국 각지에서는 크고작은 대학들이 졸업식을 올린다.
어느 학교에서 누가 연사로 초청 받았고, 그(그녀)는 가서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는지가 곧바로 뉴스가 되고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르곤 한다. 미국 대학들의 졸업 축사는 이 사회의 중요한 의례(ritual)이자 소중한 문화 자양분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이다.
머리와 마음을 함께 흔드는 축사들은 비단 졸업식장에 모인 학생이나 가족, 하객 들뿐만 아니라 이를 전해들은 일반 시민들에게도 배움과 각성의 계기가 된다. 초대받은 각 분야의 명사들은 저마다 독특한 체험담이나 일화, 인용문, 표현으로 듣는 이의 마음을 매료시킨다. 그럼으로써 미국이 자랑하는 연설 문화의 한 축이자 밑거름이 된다. ▷기사 더보기
미국에만 졸업 명연설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국내 명사들에게 만일 대학 졸업식에서 축사를 하게 된다면 어떤 말을 하고 싶은지 들었다.
기다리고 기다리라, 소처럼 묵묵하게
세상에 첫발을 내딛는 청년에게 길고 묵묵한 실천을 강조하는 이가 많았다. 조국 서울대 법대 교수는 "세상에서 밥값을 벌기는 어렵고 뜻을 세우기는 더 어렵다"고 운을 뗐다. "단박에 뭘 이루고 한 방에 대박을 내겠다는 생각, 버려라. 적어도 10년의 묵묵한 실천이 필요하다." 드라마 '정도전' '펀치'로 제2의 전성기를 맞은 배우 조재현은 "졸업이라는 역(驛)에서 내려 다음 역까지 가는 동안 비행기, 승용차, 자전거, 도보 중 무엇을 택하겠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조재현은 "자전거나 도보를 선택하는 분에게 박수를 보내고 싶다"며 "비행기로 쉽게 갈 때는 느낄 수 없는 고통이, 다가올 많은 역을 거쳐가는 데에 자산이 될 것이다. 느리더라도 고통을 택하라"고 했다.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외치다
꾸준한 정진(精進)을 일상에 옮기려면 '나'라는 중심을 굳건히 해야 한다. 이승엽 세종문화회관 사장은 선택의 갈림길에 설 때 자신을 한가운데에 두고 결정하라고 말했다. "세상의 중심은 당신이다. 모든 결정에서 가장 중요한 변수는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하라."
별이 아니라 산소가 되자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가는 기본 자세를 강조한 방송인 최불암씨는 "모두가 별이 되려는 세상에서, 모두를 위한 산소가 돼라"고 말했다. 저 혼자 빛나는 스타가 아니라 정신의 순수함을 뿜어내는 산소가 세상을 빛낸다는 뜻이다. 10년간 사재를 털어 어린이 뮤지컬을 만들어온 가수 유열씨는 "사람에게 저축하는 게 남는 것"이라며 "사람 저축의 이자로 가치를 쌓아 아낌없이 나누자"고 말했다.
인요한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은 "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라"고 충고했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고민해야 할 큰 문제가 통일이라는 지적이다. "통일은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인간이 문제를 사랑하고 정면 돌파해야지, 골치 아프다고 양탄자 밑에 쓸어넣으면 안 된다." ▷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