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혜 도쿄특파원

막부(幕府) 시대에 견줘보면 지금 일본 정계에서 쇼군(將軍·최고 권력자)은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다. 쇼군 빼고 제일 센 실력자를 셋 꼽으면 누가 들어갈까. 열흘 전까진 대답이 명쾌했다. 일본 신문 정치면을 펼치면 아소 다로(麻生太郞),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아마리 아키라(甘利明)란 이름이 벌판에 꽂힌 깃발처럼 펄럭거렸다. 아베 총리가 작년 12월 23일 도쿄 아카사카에 있는 중식당에서 이 세 사람과 저녁 먹으며 "내년에도 아베노믹스 잘해보자"고 했다.

셋은 역할과 개성이 달랐다. 아소 부총리는 그 자신도 총리를 지낸 거물이면서 아베 총리와 핏줄로 얽혀 있고 역사관도 일치하는 '아베의 혈맹'이다. 스가 관방장관은 밑바닥에서 출발해 최고 권력자 곁에 선 '아베의 복심'이다.

하지만 그날 저녁은 물론 작년 한 해 통틀어 제일 빛난 사람은 아소도, 스가도 아닌 아마리였다. 그는 아베 총리가 준 전권을 가지고 미국·일본·호주를 포함한 12개 나라를 하나로 묶어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을 성사시켰다. 세계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이 사람이 지난 28일 오후 NHK가 생중계하는 가운데 TPP 담당상 자리에서 물러났다. 뇌물 받은 죄였다.

이날 그는 "정권을 뒷받침해야 할 사람이 거꾸로 정권의 발목을 잡게 됐다"고 말하다 억울했는지 말이 막히고, "그래서 견디기 어렵다"고 말하다 다시 말이 막혔다. 사임 회견에 38분 25초가 걸렸다. 전부 사실이라면서 왜 그리 억울했을까.

그는 엄청난 일을 이룬 뒤 '한 방'에 갔다. 그가 산파 역할을 한 TPP는 세계경제의 3분의 1이 넘는 자유무역권이다. 이런 일을 이룬 실세를 돈으로 몰락시키려면 대체 얼마를 줘야 할까. 누가 나치 금괴라도 한 트럭 줬나.

아마리의 이력을 끝장낸 건 '고작' 1200만엔이었다. 일본 수도권의 이름 없는 건설업자가 자질구레한 부탁과 함께 3년간 10만~ 500만엔씩 들고 온 돈이다. 어느 정도로 자질구레했느냐면 "우리 회사 바로 옆에서 도로 공사를 하는 바람에 우리 회사 땅에서 황화수소가 솟는다. 보상받게 힘 써달라"는 수준이었다.

당사자에겐 중요할지 몰라도 세계경제의 미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이런 청탁을 위해 해당 업자는 아들뻘 되는 아마리의 비서에게 매주 회전 초밥을 샀다. 아마리를 직접 만나 돈 봉투도 건넸다. 그는 아마리가 '돈만 받고' 일은 유야무야하길래 폭로를 결심했노라 밝혔다. 알고 보니 그는 대단히 꼼꼼한 사람으로 아마리에게 건넬 현금을 일일이 복사해놨다가 몽땅 잡지사에 들고 갔다. 그 바람에 '처음부터 함정에 빠뜨릴 의도 아니었느냐'는 음모론까지 잠깐 돌았다. 아마리는 "(다른 건 몰라도) 업자가 보는 앞에서 제가 돈 봉투를 양복 주머니에 넣더란 보도는 정말로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심정은 알겠는데 대세를 바꿀 수 있는 디테일은 아니었다.

이날 회견 마지막 질문이 "TPP 조인식이 얼마 안 남았는데…"였다. 이번 일만 아니었으면 4일 TPP 조인식에서 일본 대표로 서명할 사람이 아마리였다. 그는 "솔직히 말씀드리면 가고 싶었다"고 했다. 누구도 막지 않았다. 잘못된 처신으로 그가 자신을 못 가게 막은 것이다. 그날 해 지기 전에 아베 총리가 신임 TPP 담당상을 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