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3년 12월 자동차 부품업체인 갑을오토텍 근로자 296명이 회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근로 대가로 받는 임금이 정기성·일률성·고정성 요건을 갖추면 통상임금에 해당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이에 따라 법원은 통상임금 여부를 사전에 금액이 확정돼 고정 지급되는 ‘고정성’,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정기성’, 모든 근로자에게 지급되는 ‘일률성’ 등 3가지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다.

하지만 통상임금 인정 여부를 놓고 기업과 노사의 다툼은 계속되고 있다. 법조계 관계자들은 “대법원이 통상임금의 3대 판단 기준에 더해 ‘신의성실의 원칙(신의칙·信義則)’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고 밝혀 사안이 복잡해졌다”고 지적했다.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2013년 갑을오토텍 사건 판결에서 “기업이 예기치 못한 과도한 재정적 지출을 부담하는 등 (통상임금 인정이) 기업의 경영상 어려움을 초래할 경우 정의와 형평 관념에 비춰 판단해야 한다”며 신의칙의 원칙에 따라 통상 임금 인정 여부가 달라질 수 있다는 전제를 달았다.

정기성, 고정성, 일률성을 만족하더라도 회사가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을 겪고 있으면 통상 임금에 대한 근로자의 청구권이 제한될 수 있다는 판단이다. 신의칙이란 계약 당사자가 신뢰를 저버리는 내용이나 방법으로 권리 행사를 해서는 안 된다는 민법상의 대원칙이다.

통상임금을 놓고 노사 다툼이 계속되는 이유는 통상임금 인정 범위가 넓어질수록 평균 임금이 높아지고, 평균 임금을 기준으로 산정되는 퇴직금도 덩달아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대법원이 통상임금 판단 기준을 제시한 지 2년이 넘었지만 현대중공업, 아시아나항공, 기업은행, 대우조선해양, 삼성중공업 등 기업들의 통상임금 관련 소송은 이어지고 있다.

김선우(33·변호사시험1회) 한국경제연구원 연구원·변호사는 "2013년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이 통상임금 개념과 요건에 대한 기준을 제시했지만, 하급심에서는 여전히 고정성과 신의칙 적용 요건 놓고 소송전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통상임금 법 규정 자체가 명확하지 못하고 시행령도 통상 임금 범위를 구체적으로 제시하지 않고 있다. 통상임금 관련 법령·지침 등을 좀 더 명확하게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 ‘고정성’ 두고 엇갈린 판결...‘현재 재직 중’ 조건 살펴봐야

통상임금의 3가지 요건 가운데 ‘고정성’ 여부가 가장 논란이 되고 있다. 고정성은 상여금을 정할 때 ‘기본급의 500%’식으로 근로자가 금액을 예측할 수 있게 확정해야 인정된다. 기업들은 법원마다 고정성을 판단하는 기준이 다르다고 지적한다.

2014년 10월 부산지방법원은 르노삼성자동차 통상임금 소송에서 “회사가 2개월마다 지급하는 정기상여금은 중도 퇴직자에게 지급하지는 않았지만, 고정성이 있다고 봐야 한다”며 통상임금으로 인정했다. 이는 “재직자에게만 정기 상여금을 지급하는 경우 고정성이 결여돼 통상임금이 아닌 것으로 봐야 한다”는 대법원과 다른 법원의 판결과 반대되는 판결이었다.

최근에는 급여 지급 대상 기준에 ‘현재 재직 중 근로자’라는 조건이 있다면 고정성에서 예외를 인정할 수 있다는 방향의 판결이 나오고 있다.

부산고법은 지난 14일 현대중공업 통상임금 소송에서 “명절 상여금은 ‘특정 시점에 재직 중인 근로자에게만’ 지급했다. 통상임금의 3가지 요건 중 하나인 고정성이 없어 통상임금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2심은 명절 상여금 100%를 뺀 700%만 통상 임금에 포함된다고 봤다.

법원은 작년 6월 홈플러스의 정규직과 일용직 613명이 낸 소송에서 “명절 상여금과 성과급은 ‘지급하는 날 재직하고 있는 사람에게만’ 지급하도록 단체 협약에서 정하고 있다. 통상 임금으로 볼 수 없다”고 판결했다.

박지순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상여금이나 수당이 복합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어 통상 임금 여부를 하나의 기준으로 판정하기 어렵다. 한 회사에서도 직원별로 고정성 인정 여부가 다르게 날 수 있다. 복잡한 임금과 수당 체계를 단순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에 대한 기준은?

‘기업이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에 처해 있는가’에 대한 판단 기준도 제각각이다. 경영상 어려움이 회사가 도산 위기에 있다는 뜻인지, 아니면 당기순이익이 급격히 추락했을 때인지 불분명하다는 지적이다.

같은 사건에서 시기와 법원에 따라 판단이 달라지기도 한다.

서울중앙지법은 2014년 5월 아시아나항공 임금 소송에서 “회사가 2010년 유동성 위기로 채권단 공동관리에 들어갔지만, 2012년까지 순이익을 냈다”며 경영상의 심각한 어려움(신의칙)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서울고법은 “아시아나항공의 10년 동안 손실이 1조원이 넘는다. 통상임금을 소급 청구하면 경영상 중대한 어려움이 초래된다”며 하급심 판결을 뒤집었다.

부산지법은 현대중공업 소송에서 “저수익성, 원화강세, 중국 등 경쟁자들의 출현으로 회사 경영이 악화된 것은 사실이나 이를 ‘신의칙 위반’의 근거로 삼아 근로자들에게 불이익을 주는 것은 잘못”이라고 판결했다.

하지만 부산고법은 지난 14일 현대중공업 소송에서 “근로자들의 청구를 받아들일 경우 회사로서는 예측하지 못한 재정적 부담을 지게 된다. ‘신의칙 원칙'에 따라 6300억원에 이르는 4년6개월치 통상임금 소급분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며 “명절 상여금을 통상 임금에 포함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2014년 이후 현대중공업의 조 단위 적자 상황이 고려됐다고 법조계는 보고 있다.

박지순 교수는 “경영상 어려움의 판단 기준을 영업이익, 매출, 당기순이익 중 어느 것으로 해야할지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신의칙을 판단하는 시점이 통상 임금을 미지급한 시점으로 볼지, 추가 지급을 해야할 현재 시점을 기준으로 할지도 중요한 논점”이라고 했다.

박 교수는 “절대적인 기준을 마련하기는 쉽지 않지만, 법의 안정성을 높이려면 공통의 기준이 필요하다. 여러 변수를 고려해도 60~70%는 공통 부분이 있을 것이다”고 했다.

◆ 경영상 어려움 판단은 “구체적 기준 제시 어려워...사안별로 봐야”

판사들은 “현실적으로 중대한 경영상 어려움이 무엇인지 일반적인 기준을 제시하기 어렵다. 예외적인 상황이 많고 회사에 따라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한다.

서울고등법원의 한 판사는 “당기순이익이 경영상 어려움을 판단하는 가장 정확한 지표이기는 하지만, 기업이 매출채권·감가상각·대손충당·사내유보금을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당기순이익 규모는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 결국 사안에 따라 달리 판단할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또 다른 판사는 “(통상임금 인정 여부는) 경기 변동에 민감한 산업인지, 당장 영업 적자는 많지만 전망이 좋은지 나쁜지, 인건비 비중이 얼마나 되는지 등을 고려한다. 판단 기준을 일률적으로 정하기 어렵다”고 했다.

대법원도 ‘신의칙’ 등 통상임금 판단 기준을 보다 명확히 정할 필요성을 인정하고 있다. 대법원은 작년 말 시영운수 근로자 23명이 “정기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해 다시 계산한 미지급분을 소급해서 지급하라”며 낸 임금청구 소송을 전원 합의체에 회부했다. 대법원 관계자는 “전원합의체에서 신의칙 적용 기준 등 폭넓은 논의가 있을 것”이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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