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 총수를 만나는 것은 특이한 경험이다. 본사 사옥인 고층 빌딩 로비에서 우선 홍보실이나 비서실 직원을 만나 그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탄다. 회장을 만나러 왔기 때문인지 말쑥한 차림의 젊은 안전요원들도 목례를 한다. 매일 출근하는 회사에서는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으니 황송하고 어색하다. 회장실이 있는 층에 닿아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면 깔끔한 벽에 유명 작가들의 그림이 걸려 있다. 곧이어 접견실에 들어서면 마치 이 회사에 입사 면접을 보러 온 듯한 심정이 된다. 이윽고 접견실과 회장실을 잇는 미닫이문이 열리면서 박삼구(71)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나타났다. 그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성큼성큼 걸어오면서 두 손을 내밀었다. 이미 만나본 적 있는 사진기자가 "격의없고 소탈한 사람"이라고 귀띔했었다. 그 말에 어울리는 첫인상이었다.

박 회장은 오랫동안 인터뷰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알짜 계열사를 매각하고 주력 기업도 워크아웃에 들어가면서 그룹 전체가 위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작년 말 6년 만에 금호산업을 되찾으면서 활력을 회복한 박 회장은 올 신년사에서 '창업 초심(創業 初心)'을 경영 방침으로 내놓았다.

그룹이 위기에 처했을 때도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의 문화예술 지원은 끊이지 않았다. 그는 “회사가 어려울 때도 걱정스러운 것 중 하나가 ‘예술가들을 지원하기 어려워지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음악 영재들에게 고가(高價)의 악기를 무상 대여해주는 ‘악기은행’을 운영하고 있다. 박 회장이 들고 있는 과다니니 바이올린은 1794년 제작된 것으로 구입 당시 2억원가량이었다. 이 바이올린으로 작년 임지영(21)이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 우승을 일궈냈다.

조성진을 발굴한 금호영재콘서트

금호아시아나에 인터뷰 요청을 한 것은 그룹이 흔들리는 와중에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 이사장으로 문화예술 지원을 하고, 한국메세나협회 회장을 맡고 있으며 한국방문위원장까지도 겸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역시 "회사 관련된 이야기는 가급적 하지 맙시다. 이미 할 만큼 다 했고…"라고 웃으며 말했다.

폴란드에서 5년마다 열리는 쇼팽 콩쿠르에서 작년 10월 우승한 피아니스트 조성진(22)은 '금호 영재' 출신이다. 그는 11세이던 2005년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이 주최하는 금호영재콘서트로 데뷔했고 2011년 금호아트홀 신년음악회에 선 최연소 연주자였다. 이 밖에도 한국을 대표하는 피아니스트 손열음(30)과 김선욱(28), 작년 벨기에의 퀸 엘리자베스 콩쿠르에서 한국인 최초로 우승한 바이올리니스트 임지영(21)도 금호 영재 출신이다. 1998년부터 매년 2회 열리는 오디션에서 지금까지 금호 영재로 발탁돼 지원받은 뮤지션은 1200명이 넘는다.

―작년 11월 조성진 일본 공연 때 직접 가셨죠.

"예. 격려해주려고 갔죠. 그런데 그 친구가 숫기가 좀 없어서… 쇼팽 콩쿠르 우승한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제가 도쿄까지 가면 확 안아줄 줄 알았더니 안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약간 서운했습니다. 하하하."

先代 회장 남도예술가 지원으로 시작

―금호아시아나문화재단은 미술을 지원하면서 생긴 것 아닙니까.

"1977년에 창업 회장(고 박인천 금호그룹 창업주)이 재단 만드실 때는 장학사업부터 했어요. 학생들 장학금 주고 광주·전남의 향토 문화예술을 지원하는 것으로 시작했죠. 재단을 서울로 옮기면서 클래식 음악 지원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창업 회장도 문화예술에 관심이 많으셨나요.

"우리 어르신은 동양화와 서예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의재 허백련(1891~1977) 화백, 소전 손재형(1903~1981) 선생 같은 서예가, 국창 임방울(1904~1961) 선생 이렇게 세 분은 문화재단을 통해서 굉장히 지원을 많이 해드렸습니다. 제가 초등학생 때 그분들이 저희 집에 오셔서 글씨도 쓰고 창(唱)도 하고 그랬어요. 그럼 저는 그 옆에서 먹을 갈기도 하고 창 하시는 걸 녹음하기도 하고 했지요."

―임방울 선생의 그때 녹음이 있다고요?

"불행히도 그게 어디 갔는지 찾지를 못하겠어요. 그때 제가 창에 굉장히 흥미를 느껴서 아카이(Akai)라는 일제 릴 녹음기로 녹음했었는데… 1957, 58년쯤 될 겁니다. 우리 집 사랑방에서 녹음했었지요."

―1977년 문화재단을 만들 때 이탈리아의 메디치 가문을 염두에 둔 걸까요.

"그때는 그런 가문이 있는 줄도 몰랐죠. 유럽에 대한 정보가 별로 없었으니까요. 다만 예술 하는 분들을 경제계에서 도와줘야 한다, 그런 생각은 확고하셨던 것 같습니다."

15~16세기 피렌체공화국의 메디치가(家)는 대를 이어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예술가를 지원한 ‘메세나 운동’의 대표적 가문으로 꼽힌다. 음악과 미술 영재들을 키우고 ‘아시아나 단편영화제’로 젊은 영화인들을 지원하는 박 회장 가문을 그렇게 표현하는 것은 과장이라고 하기 어렵다. 신영희(74) 명창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어렸을 때 나도 박인천 회장 댁에 가서 창을 하곤 했다. 그때 박삼구 회장을 만나기도 했는데, 금호문화재단이 설립된 것은 1977년이지만 ‘한국의 메디치가’가 시작된 것은 그보다 훨씬 전의 일이었다.”

금호아시아나가 클래식 연주자들을 적극 지원하기 시작한 것은 고(故) 박성용 회장 때부터다. 서울대 졸업 후 미국 일리노이대와 예일대에서 공부했던 그는 소문난 클래식 애호가였다. 그와 함께 예일대를 다녔던 이홍구(82) 전 국무총리는 박삼구 회장에게 “그때 박성용 회장 기숙사 방에 가보면 늘 오디오로 클래식을 틀어놓고 듣고 있었다”고 말했다.

금호아시아나는 창업주 고(故) 박인천 회장의 뜻을 따라 영재(英才) 위주로 문화예술을 지원해왔다. 지난 2011년 러시아 차이콥스키 콩쿠르에서 입상한 금호 영재들을 축하하려고 만난 박삼구 회장. 왼쪽부터 피아니스트 손열음, 바이올리니스트 이지혜, 박 회장, 피아니스트 조성진. 당시 17세였던 조성진은 작년 세계 최고 권위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했다.

‘한국의 메디치家’라 불리기도

―영재(英才)에게 지원을 집중하는 이유가 있습니까.

“창업 회장님 취지가 ‘영재는 기르고, 문화는 가꾸고’였습니다. 걸음마 시켜주고 나면 알아서 가고 또 다른 걸음마를 시켜줘야죠.”

박 회장은 작년 2월 한국메세나협회 회장에 취임했다. 지난 2003년 맏형 박성용 회장이 이 협회 회장을 맡은 데 이어 최초로 형제가 메세나협회 회장이 된 것이다. 문화예술가를 지원했던 로마제국 정치가 마에케나스 이름에서 따온 메세나(Mecenat)는 기업의 문화예술 지원을 상징하는 용어다. 박성용·삼구 형제는 또 만년필로 이름난 독일 기업 몽블랑이 주는 ‘몽블랑 문화예술후원자상’을 지난 2004년과 2014년 각각 받았다. 박 회장은 몽블랑 후원자상 시상식에서 “형이 이 상을 받았고 제가 받았으니, 소원이 있다면 언젠가 제 아들이 이 상을 받았으면 한다”고 말해 큰 박수를 받았다.

―고향인 광주에 금호아트홀을 지었죠.

“2008년 보은 차원에서 지었습니다. 그룹이 잘되면 부산에 금호아트홀을 꼭 짓고 싶습니다. 한국 제2의 도시 부산에 아트홀을 짓고 그다음엔 제주에도 짓고, 전국에 아트홀을 지어서 멋진 무대를 제공하고 싶습니다.”

―한국방문위원회 위원장도 맡고 있는데 작년 외국인 관광객이 12년 만에 처음 감소했습니다.

“작년에는 메르스가 컸지요. 지금 한 해 외국인 관광객이 1320만 정도인데, 이게 2000만, 3000만은 돼야 한다고 봅니다. 유럽의 경우 인구가 9억인데 관광객이 65%, 즉 한 해 6억명 정도 오거든요. 2018년까지 방문위원장을 맡았는데 그때까지 어떻게든 2000만명 시대는 만들어 볼 생각입니다.”

―2000만 관광객 시대가 되려면 뭘 해야 합니까.

“중국이나 일본이나 아직 한 번도 한국에 와보지 않은 사람이 엄청나게 많습니다. 제가 2009년 시진핑 당시 중국 부주석이 한국 왔을 때 말했습니다. ‘한 해 중국인 100만명이 한국에 오는데 13억 인구가 다 오려면 1300년이 걸립니다.’ 그랬더니 시 주석이 허허 웃더라고요. 작년에 중국인 600만명이 왔습니다. 그래도 200년 넘게 걸립니다. 한 번도 와보지 않은 사람들을 오게끔 하는 관광정책이 꼭 필요합니다.”

이쯤 해서 인터뷰는 대기업 총수와 하는 것인지 문화관광부 장관과 하는 것인지 헷갈릴 지경이 됐다. 그는 2002년 9월 큰형 박성용(1932~2005) 회장과 작은형 박정구(1937~2002) 회장에 이어 그룹 회장직을 맡았다.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을 인수하며 야심차게 경영을 확대했으나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가 닥치면서 주요 계열사를 매각하거나 채권단에 넘기는 고통을 겪었다. 2009년 경영 책임을 지고 명예회장으로 퇴진했으나 주력사인 금호산업과 금호타이어까지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2010년 경영 일선에 복귀한 박 회장은 작년 말 금호산업을 되사들이고 채권단에 넘어간 금호타이어까지 재인수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런 그가 한국 문화예술 지원사업과 관광 활성화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외국 다녀보면 한국에 뭐 볼 게 있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만.

“저는 신입사원들과 산행을 많이 다닙니다. 지난주에도 갔었는데 사원들이 물어요. ‘어느 산이 좋습니까’. 제 답변은 ‘이 산은 이 산대로 좋고, 저 산은 저 산대로 좋다’입니다. 바로 그게 한국 관광의 세일즈 포인트입니다. 우리에게 내세울 것이 없다, 그렇게 생각하면 절대 안 됩니다.”

―한국방문위원장으로 꼭 하고 싶은 사업이 있습니까.

“케이블카입니다. 한라산이나 북한산 같은 데 케이블카 해놓으면 엄청나게 올 것입니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 가면 테이블마운틴이라고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걸 볼 수 있는 산이 있습니다. 거기에 케이블카가 있습니다. 관광객들이 거기 언제 걸어 올라갑니까. 그리고 노약자와 장애인도 구경해야죠. 환경은 인간이 만들어 가는 겁니다. 모나코 보세요. 그 해안을 전부 시멘트로 발랐는데 최고의 관광지가 됐죠. 케이블카 하나 설치한다고 자연 훼손이고 난개발이라면, 근대 문명을 전부 없애야 한다는 논리와 다를 게 없어요.”

박 회장은 5남 3녀 중 다섯째였다. 그의 이름 삼구(三求)는 구(求)자 항렬에 셋째 아들이라는 뜻으로 단순하게 지은 것이다. 그는 “큰형님도 원래 준구(準求)였는데 이름을 바꿨다”며 “셋째 아들이라서 붙인 이름이지만 워낙 동양에서는 3이란 숫자를 좋아했기 때문에 이름에 불만을 가진 적은 없다”고 했다. 그는 “삼성(三星)을 비롯해 일본 기업 미쓰비시(三菱)나 미쓰이(三井)가 ‘삼’자를 쓴 이유가 있다”고 덧붙였다. 8남매 가운데 박종구(朴鍾九) 초당대 총장만 유일하게 아홉 구(九)자를 쓰는데 박 회장은 “그건 출생신고 받던 동사무소 직원이 실수로 잘못 쓴 것”이라며 껄껄 웃었다.

지난 2009년 서울 신라호텔에서 시진핑 당시 중국 부주석과 한국 관광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박 회장

“금호타이어, 꼭 인수할 것”

―선친으로부터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은 무엇입니까.

“책임감입니다. 나 자신과 내 가족, 우리 회사 직원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큰형님은 일찍 외국에 나가셨고 해서 제가 선친을 가장 오래 모신 아들이었습니다. 책임감이 굉장히 강한 어른이었습니다.”

―22세 때 금호타이어에 입사하면서 사회생활을 시작했죠. 그래서 금호타이어에 더 애착이 강합니까.

“그래서 애착이 강한 건 아닙니다. 금호타이어는 우리 그룹에서 글로벌 상품을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회사입니다. 경쟁력도 있고 가능성도 높습니다.” 금호타이어는 채권단이 매각하려는 금호아시아나의 ‘마지막 퍼즐 조각’으로 불린다. 박 회장에게는 금호타이어에 대한 우선매수청구권이 있다.

―금호타이어를 인수할 겁니까.

“(잠시 생각한 뒤) 인수해야죠. 누가 도와주겠죠. 도와줄 겁니다.”

―회사가 어렵던 2013년에 아시아나 항공기가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큰 사고를 냈었죠.

“아, 그 와중에 사고가 났죠. 어떻게 이런 상황에 이런 사고가 났나 해서 그때 참 힘들었습니다.”

―하늘을 원망했습니까.

“제가 우리 그룹을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그 막중한 책임감으로, 창업 회장님에게서 배운 그 책임감으로 이겨내지 않았나 싶습니다.”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정신적으로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우리 동생하고 문제가 생기니까 그게 제일 힘들었죠. 우리 그룹에 대한 이미지도 손상이 있었고요. 그런 점이 개인적으로 힘들었습니다.” 박 회장의 바로 아래 동생 박찬구(68) 금호석유화학그룹 회장은 그룹 분리 과정에서 사이가 나빠져 서로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박 회장은 “내 잘못이 크다”며 화해의 뜻을 전했지만 아직 앙금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았다.

박 회장은 등산과 골프 외에 3년 전부터 복싱을 하고 있다. 매주 사흘, 회당 20분가량 샌드백을 치고 복싱 트레이닝을 한다고 했다. 그는 “땀을 흠뻑 흘릴 수 있는, 다이어트에 가장 좋은 운동이 복싱”이라고 했다.

―좌절하고 포기하는 요즘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까.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자강불식(自强不息), 자신을 강하게 만드는 데 쉼이 없어야 합니다. 자기를 사랑하지 않으면 노력할 수 없습니다. 우선 자기를 사랑해야 합니다.”

박 회장이 가장 좋아하는 음악가는 지휘자 카라얀이다. 그는 이 대목에서 이렇게 말했다. “카라얀은 늘 눈을 감고 지휘했어요. 그런데 일흔 살이 넘은 1970년대 후반 이후 연주를 보면 눈을 뜨고 지휘합니다.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대답을 찾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그가 말했다. “그건 아무도 몰라요. 그런데 제 생각엔 평형감각 때문일 것 같습니다. 나이 들면 눈 감고 오래 서있을 수가 없습니다. 아마 카라얀도 그때는 눈 감고 지휘하기가 힘들었을 겁니다. 하하하.”

박 회장의 애창곡은 배호의 ‘추풍령’이다. 그는 “저음 파트가 멋지고 자신있게 부를 수 있다”고 했다. 부잣집 아들로 태어나 그룹 경영권을 이어받았고, 공격적으로 사세를 확장하다가 큰 위기를 맞았던 그가 ‘추풍령’을 즐겨 부르고 일흔 넘어 눈을 뜨고 지휘한 카라얀을 좋아한다는 말이 예사롭지 않게 들렸다. “구름도 자고 가는/ 바람도 쉬어 가는/ 추풍령 굽이마다/ 한 많은 사연” 하는 추풍령을 그가 부르면, 목이 조금 멜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