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탕 길을 거침없이 내달리는 경주차가 90도로 꺾어지는 급커브에서 오히려 속도를 전속력으로 올린다. 팬들이 가슴을 졸이는 찰나, 드라이버가 갑자기 핸들을 꺾으며 주차 브레이크를 당긴다. 그러면 피겨스케이팅이라도 하듯 경주차는 뒷바퀴가 쭉 미끄러지며 절묘하게 코너를 돌아나간다. 환상적인 '드리프트 기술'에 환호가 쏟아진다. 22일 막을 올리는 WRC(월드 랠리 챔피언십)는 전 세계 모터스포츠 팬들이 손꼽아 기다리는 빅 이벤트다. F1(포뮬러원)과 함께 세계 모터스포츠의 양대 산맥이라 불리는 WRC는 모나코 몬테카를로에서 사흘간 2016시즌 첫 번째 라운드를 펼친다.
이 뜨거운 무대에 도전장을 던진 한국인이 있다. 한국인 최초 WRC 드라이버를 꿈꾸는 임채원(32)이다. 서울대 기계항공공학부 출신인 그는 2009년부터 카레이싱에 뛰어들었다. 임채원은 처음엔 F1을 목표로 달렸다. 일본과 중국을 거쳐 2013년 F1의 등용문으로 통하는 F3 무대에 진출했다. 그해 7월 영국에서 열린 유러피언 F3 오픈 9라운드에선 우승을 차지하며 한국인 최초의 F3 시리즈 챔피언이 됐다. 하지만 더 나아가진 못했다. 상위 단계로 올라가려면 엄청난 비용이 드는데, 선뜻 나서는 후원자는 없었다. 결국 임채원은 2014시즌을 끝으로 핸들을 놓았다.
꿈을 접은 그는 한동안 방황했다. 그러다 한 방송국의 오디션 프로그램에 참가하며 전환점을 맞았다. 서바이벌 형식으로 테스트를 치러 단 한 명을 뽑는 '더 랠리스트'란 프로그램에서 그는 5000대1의 경쟁률을 뚫고 우승의 영광을 안았다. 그는 모나코 WRC에 참가하는 현대모터스포츠팀에 우승자 자격으로 합류했다. WRC 현대모터스포츠팀은 그를 제외하면 벨기에 스페인 뉴질랜드 등 전원 외국인 선수로 구성돼 있다.
포장도로인 서킷에서 바퀴가 차체 밖으로 튀어나온 경주차가 속도를 겨루는 포뮬러와 달리 랠리는 양산차를 개조한 차량으로 진흙탕·눈길·자갈밭 등 험로(險路)를 주파한다. 일종의 장거리 장애물 경주인 셈이다. 작년 시즌엔 350만명의 관중과 6억2000만명의 TV시청자가 WRC의 재미를 만끽했다. 임채원은 "포뮬러는 칼날 같은 조종 기술이 필요하지만 랠리는 차의 움직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서 수많은 조작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고 했다.
임채원은 현재 몬테카를로에 머무르고 있다. 일종의 견습생인 '영 드라이버(young driver)' 신분이라서 운전대를 잡고 경기에 나설 수는 없다. 하지만 한국인 최초 WRC 드라이버로 가는 길은 점차 열리고 있다. 그는 "개척자의 정신으로 WRC에서 한국인 드라이버가 활약하는 모습을 꼭 보여주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