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이나 인물을 표현할 때 '영화 같은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영화가 현실을 앞서간 적이 있었던가. 그래서 영화감독들은 실화나 실존 인물을 영화로 옮겨버린다. 다음 달 열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 후보에 오른 영화 여덟 편 중 다섯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21일 개봉하는 '스티브 잡스'(감독 대니 보일)와 '빅쇼트'(감독 아담 매케이)는 각각 애플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를 다뤘다. 둘 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주요 뉴스였는데도 영화를 볼 땐 마치 새로운 이야기를 보듯 가슴이 뛴다. '스티브 잡스'와 '빅쇼트'는 현실을 영화로 만들 때의 전범(典範)을 몇 가지 제시한다.

영화 '스티브잡스'(위 사진)에서 배우 마이클 패스빈더는 잡스를 예민하고 포악한 모순 덩어리로 그려낸다. '빅쇼트'는 탐욕이 초래한 비극을 지적이고도 코믹하게 보여준다.

['끊임없이 갈망하고 겸손하라'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①과감히 생략한다

'스티브 잡스'는 3막짜리 연극과 비슷한 구성이다. 1984년과 1988년, 1998년 잡스가 신제품 출시를 앞두고 프레젠테이션 들어가기 직전 40분을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56년 잡스의 인생 중 딱 120분만 보여주는 셈이다. 짧게 들어가는 회상 장면을 제외하고는 장소도 프레젠테이션하는 곳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의 성장 과정이나 개인사를 따로 보여주지 않는 대신 제한된 시공간 속에서 잡스란 인물을 표현한다. 모든 대사, 동작 하나를 한숨도 돌릴 수 없을 만큼 치밀하게 구성할 수밖에 없다. 그 유명한 프레젠테이션 장면엔 단 1초도 할애하지 않는다. 잡스가 프레젠테이션의 귀재라는 건 누구나 다 알기 때문이다.

'빅쇼트'는 금융 위기를 설명하기 위해 은행과 정부가 아니라 금융 위기를 예측해 돈을 번 펀드매니저와 은행원들의 행보를 담는다. 숲이 너무 크니 숲을 날아다니는 새를 보여주겠다는 것이다. 일반 관객이 이해하기 어려운 금융·경제 용어가 나올 때는 배우 마고 로비, 요리사 안소니 부르댕, 가수 셀레나 고메즈가 나와서 짧고 명쾌한 강연을 해준다. 쓸데없는 데 힘 빼지 않겠다는 전략이다.

②냉정함을 유지한다

실화의 장점은 관객이 감정이입하기 쉽다는 것이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등장인물을 영웅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이때 등장하는 게 악역이다. 이순신 장군이 주인공인 '명량'이 배설 장군의 후손들에게 고소를 당한 것도 선악 대결을 명확히 하기 위해 악역을 무리하게 설정한 탓이다.

'빅쇼트'가 관객의 공감대를 쉽게 이끌어내고자 했다면 보너스 파티를 벌이는 월가의 CEO들과 집을 잃고 거리에 나앉은 서민들을 대비시켰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는 눈물과 분노 대신 웃음과 긴장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택한다. 두 시간 남짓 관객들을 롤러코스터에 태우고 온갖 재밌는 구경거리를 보여준 뒤에 그냥 멈춰버린다. 그제야 관객은 자신이 응원하던 주인공들도 결국은 수백만명이 집과 직장을 잃고 나서 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 영화는 가슴에 찬바람 한 줄기 부는 그 순간을 노린다.

③배우에 공을 들인다

실화를 다룬 영화를 완성시키는 건 8할이 배우다. 잡스처럼 관객이 잘 아는 인물이 주인공일 경우 배우가 실재 인물을 연상케 하지 못하면 실패다. 특수효과나 액션 연기도 쓸 수 없으니 배우의 연기를 위장할 만한 꼼수도 못 쓴다. 메릴 스트리프나 대니얼 데이 루이스 등이 유명 실존 인물을 연기하면서 아카데미 연기상을 받은 데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스티브 잡스'에서 마이클 패스빈더가 연기한 잡스는 세상을 바꾼 천재라기보다는 예민하고 포악한 모순덩어리에 가깝다. 굳이 잡스의 업적에 연연해 하지 않는 이 영화가 성취하고자 했던 지점을 꿰뚫는 연기다. 크리스천 베일, 브래드 피트 등이 나온 '빅쇼트'는 월스트리트판(版) '오션스 일레븐'이다. 이들은 탐욕이 초래한 비극을 지적이고도 코믹하게 보여줬다. 중식과 한식, 양식을 다 잘하는 요리사를 만나는 반가움이 이런걸까. 빼어난 코미디와 다큐멘터리, 스릴러, 그리고 휴먼스토리를 한 번에 봤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