습작 시절 내 취미는 스티븐 킹의 책을 찾아 헌책방을 순례하는 것이었다. 수년에 걸쳐 끈질기게 발품을 팔아 절판된 번역본을 사 모았다. 그 중엔 '끝내 읽지 못하고 늙어서 죽겠구나'라고 비관하던 무렵에 얻은 책도 있다. 킹이 리처드 바크먼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롱 워크'다. 최근 다시 번역됐지만 1994년 '완전한 게임'이라는 제목으로 처음 번역된 이 책은 눈 밝은 후배가 헌책 시장에 올라온 걸 낚아채서 토스해준 덕에 내 것이 되었다. 얼마나 좋았는지, 바로 읽어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가슴에 끌어안고 하룻밤을 보낸 후에야 꿈 같은 기분으로 첫 장을 열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며 느낀 건 발밑까지 아득해지는 좌절감이었다. 이걸 10대에 썼단 말이지….
'롱 워크'는 킹이 고교 3학년 때 쓰기 시작해 대학 1학년 때 완성한 소설이다. 킹 신도협회 한국 지부 회장이자 번역가인 조재형씨에 따르면 랜덤하우스가 주관한 공모전에 보냈다가 여지없이 미역국을 먹은 소설이기도 하다. 이후 오래도록 그의 상처받은 가슴에 묻혀 있어야 했다. 그러니까 킹이 대중작가로 성공한 후 바크먼이라는 필명으로 '분노'를 출간해 '문학적'으로도 성공할 때까지. 롱 워크가 킹의 처녀작이면서 바크먼의 두 번째 작품으로 발표된 이유다.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이렇다. '전체주의 국가가 된 미국 전역을 끝없이 걷는 경주, 롱 워크에 참가한 100명의 소년들이 최후의 1인이 되기 위해 별짓 다 하는 이야기."
경기 규칙을 요약하면 이렇다. 보속을 시속 6km로 유지할 것. 속도를 위반하면 경고 한 번. 한 시간 내에 속도위반을 하지 않으면 경고가 사라지나, 반대일 경우 경고가 누적되고 누적 경고 수가 네 개가 되는 순간 곧바로 사살된다. 당연한 얘기지만 쉴 수도, 잘 수도 없다. 수면, 식사, 배변, 뭐든지 걸으면서 해결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도 없다. 단 한 사람만 살아남을 때까지 걸어야 한다.
킹은 롱 워크 출발선에 주인공 개러티와 99명의 소년을 풀어놓고 그들의 뒤를 추적해간다. 독자도 소년들의 잔인하고 쓸쓸한 여로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가다 보면 가슴이 울컥해온다. 우연한 시간, 우연한 곳에서 우연히 누군가의 아이로 태어난 후 죽을 때까지 죽을 힘을 다해 살아야 하는 우리 인생을 보는 것 같아서. 조재형씨의 멋진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인간은 인생이라는 틀 안에서, 롱 워크 경주의 선수'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