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문외한인 사람이라도 '비싼 그림' 이야기엔 귀가 솔깃하게 마련이다. 서울옥션과 그 모기업인 가나아트센터 설립자 이호재(62) 회장에게 만남을 청한 건 지금이 '그림값 이야기'를 하기에 적기(適期)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미술품 경매 회사 서울옥션에 2015년은 기념비적인 해였다. 연간 낙찰 총액이 1081억원을 기록해 1998년 12월 회사 설립 이래 처음 1000억원을 넘겼다. 김환기의 1971년 작 회화 '19-Ⅶ-71 #209'가 10월 홍콩 경매에서 3100만 홍콩달러(약 47억2100만원)에 낙찰돼 한국 현대미술 작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웠다.

“경매회사의 주 고객은 어떤 사람들이냐”고 묻자 이호재 서울옥션 회장은 “해외에서는 작품 값 최상위 작가 작품의 60~70%를 투자회사에서 산다. 그런데 국내 시장 고객은 대부분 개인”이라고 했다. 이호재 회장 뒤에 걸린 지름 129㎝의 원형 작품은 2012년 런던올림픽 기념탑 설계자인 인도계 영국 작가 아니시 카푸어의 ‘무제’(2014). 스테인리스 스틸 거울에 세계와 시공간의 깊이가 함께 담긴다.

12월엔 고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도 나왔다. 보물 제1210호 '청량산 괘불탱'이 35억2000만원에 낙찰됐다. 연초 5000원을 밑돌았던 주가도 6월 무렵 2만4000원대까지 치솟은 뒤 2만원대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달 28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3층 접객실. 이호재가 앉은 탁자 위에 A4 용지 여러 장이 널려 있었다. 인터뷰 질문을 예상하고 손수 답변을 적어봤다고 했다. 답변서를 넘기는 손이 60대 남성답지 않게 하얗고 통통했다. 화랑업계 '미다스의 손'이라는 그다. 사놓고 처음 꺼내 입었다는 진회색 정장과, 좀처럼 매지 않는다는 넥타이의 붉은색 덕에 흰 피부와 새카만 눈썹이 도드라졌다.

접객실 한쪽 벽에 '가장 비싼 한국인 생존 작가'라는 이우환 그림이 걸려 있었다. 시장 이야기부터 시작했다.

"미술품 값은 나라의 자존심"

―2015년 한 해 성과가 좋았다.

"갈 길이 멀다. 이제 중졸 검정고시에 합격한 것 같은 느낌이다. 우리나라 작가로 된 시장이 만들어진 덕이다."

―시장이 만들어지다니?

"국내 시장 매출액은 2014년이나 2015년이나 차이가 없다. 다만 홍콩 시장 매출이 156억원에서 650억원으로 늘어났다. 예전에는 외국 시장에서 우리나라 작가 작품은 값이 싼 젊은 작가 위주로 팔렸다. 그런데 2015년엔 사정이 달랐다. 박서보, 정상화 같은 단색화(單色畵) 작가 작품이 한 점당 100만달러(약 12억원)를 돌파했다. 생존 작가 작품이 100만달러 넘어간다는 건 세계 미술 시장에서 한국 미술이 본류(本流)에 들어갔다는 거다. 이런 붐을 해외 수집가들이 만들었다는 점을 특히 주목할 만하다."

지난 1월 1일자 뉴욕타임스는 2015년 세계 미술 시장 결산 기사에서 "컬렉터들이 세계 미술사에서 도외시됐던 부문에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며 새롭게 떠오르는 장르로 1970년대 한국 미술계를 풍미한 단색 추상화를 꼽았다. 신문은 "하종현, 윤형근, 박서보, 정상화 등 단색 화가들이 국제 미술 시장에서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올해는 사정이 달라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세계시장에서 한국 미술 작품이 비싼 값에 거래된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경험상 말하자면 우리나라 격(格)이 올라가는 것이고 나라의 자존심, 국가 브랜드가 생기는 거다."

―그림값이란 소수 미술품 수집가에게만 중요한 것 아닌가. 국격과 어떻게 연결이 되나.

"자본주의 시장에서 미술품 가격과 문화적 성숙도는 관련성이 높다. 가격이 높다는 건 작품 질이 보장된다는 뜻이다. 현대미술 작가 중에 워낙 작품값 비싼 작가가 많기 때문에 해외 미술관에서 100만달러 미만 작품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이는 우리 작가 작품 값이 올라가야 해외 미술관에 소장되고, 해외에 한국 미술이 알려진다는 이야기다. 작품 가격이 한 나라의 미술 문화 수준을 보여주는 척도가 되는 거다."

47억원에 낙찰된 김환기 작품 지난해 10월 서울옥션 홍콩 경매에서 3100만홍콩달러(약 47억2100만원)에 낙찰되며 한국 현대미술 작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세운 김환기의 ‘19-Ⅶ-71 #209’(1971).

―비싼 작품이 좋은 작품이라는 이야긴가.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되도록 만들어진다. 앤디 워홀이건 '세계에서 가장 비싼 생존 작가' 데이미언 허스트건 사람들이 작품 퀄리티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안 한다. 오직 값을 이야기한다. 가격이 올라가야 미술품이 대우받는다."

―왜 다른 예술과는 달리 미술에서는 유독 가격을 중요하게 여길까.

"'소유의 예술'이니까. 다른 예술품은 공유가 가능하다. 미술품만이 유일하게 단독으로 가질 수 있는 예술품이다."

"그림 거래에 대한 편견이 제일 힘들다"

'처음'은 이호재에게 자주 따라붙는 수식어다. 그는 1990년 국내 화랑 최초로 가나아트갤러리를 법인 등록했다. '화랑=개인 사업자'라는 인식에 전환을 가져왔다. 1998년엔 국내 최초로 미술품 경매 회사 서울경매(서울옥션의 전신)를 세웠다. 2008년엔 서울옥션을 코스닥 상장하고 그해 홍콩 법인을 세우며 홍콩 시장에 진출했다. 서진수(미술시장연구소장) 강남대 교수는 이호재에 대해 "단순히 미술품을 사고파는 것을 넘어 미술 시장 가격 정보 형성에 기여했다"고 평했다.

―서울옥션을 설립한 1998년은 IMF 사태 한파가 몰아치던 때였다. 사업을 확장하기에 부담스럽지 않았나.

"1990년 이전엔 국내 그림값이 떨어진 적이 없다. 고객들이 '그림값이 떨어지면 책임져 주겠냐'고 말하면 화상들이 '책임져 주겠다'고 말하는 분위기였다. 그런데 1991년 걸프전이 나자 그림값이 매년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IMF 사태가 터지자 그림 사겠다는 고객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고객들을 만나면 예전에 비싸게 샀던 그림을 다시 팔아달라는 이야기를 하니 부담스러웠다. 그래서 숨통을 틔우려고 미술계 인사 8명이 모여 경매 회사를 세웠다. 그림이 싸면 싼 대로 비싸면 비싼 대로 팔 수 있는 게 경매 회사다. 그렇게 그림을 팔아주면서 다시 시작했다."

국내 미술 시장이 호황을 누린 2000년대 중반은 서울옥션에 기회인 동시에 위기였다. 2005년 3월 서울옥션에서 거래된 이중섭 작품이 위작 판정을 받았다. 2007년 5월 경매에선 박수근의 '빨래터'가 45억2000만원에 낙찰되며 당시 한국 현대미술 작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경신했지만 한 미술 잡지가 이 그림에 대해 위작 의혹을 제기하면서 진위 공방이 일었다. 이후 한국미술품감정연구소가 '빨래터'에 대해 진품 판정을 내렸지만 서울옥션의 신뢰도는 타격을 입었다.

―위작 사건 당시 심정이 어땠나.

"시장이 만들어지면서 여러 가지 일이 많았던 것 같다. 그 사건을 겪으면서 개인 감정에서 벗어나 회사 차원의 경매 시스템을 마련했다. 발전이라면 발전이다."

―경매 회사와 화랑을 운영하며 가장 힘든 건 역시 위작 문제인가.

"아니다. 그림 거래에 대한 편견이 제일 힘들다. 지난해 10월 뉴욕 크리스티에서 모딜리아니 작품을 1972억원에 산 중국 수집가는 경매 끝나자마자 신분을 밝히며 보도 자료를 냈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선 사정이 다르다. 그림을 돈으로만 보다 보니 그림 사는 걸 쉬쉬해야 하는 분위기가 조성돼 있다."

―우리 사회가 비싼 그림 사는 사람에게 편견을 갖는 데엔 미술품을 이용해 비자금을 조성한 기업들 책임도 있다.

"미술 시장이 제대로 자리 잡는 과정 중 하나다. 미술품을 처음 사는 사람들은 재산을 불리거나 자식에게 주려고 산다. 그런데 작품 규모가 어느 정도 커지면 묘하게도 선순환이 일어난다.'미술관을 만들겠다'는 흐름을 타게 된다. 그렇게 미술관이 생기면 사회의 공공재가 되는 거다."

이호재 서울옥션 회장이 지난달 28일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건물 3층 발코니에 서서 뒤를 돌아보고 있다. 건너편 옥상의 은색 작품은 문신의 ‘화합II’(1991), 검은색 작품은 조엘 사피로의 ‘무제’(1997)다.

“‘큰 사람’과 일하면 쉽게 풀린다”

대학(경희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한 이호재가 처음 화랑업계에 뛰어든 건 24세이던 1978년이다. 군 복무 중에 만난 경복고 동창 염기설 현 예원화랑 대표가 “화랑업계에서 함께 일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다. 중고생 대상 그룹 과외를 하며 짭짤한 수입을 올리고 있었지만 화랑이라는 곳이 멋있게 느껴졌다. 결국 과외를 그만두고 고려화랑에 취직했다.

―고려화랑에서 4년을 일했다. 첫 직장인 셈인데 뭘 배웠나.

“고객 만나는 법을 배웠다. 고객을 처음 만나는 건 쉽지만 두 번째 만나는 건 쉽지 않다. 처음 만났을 때 계속 만날 수 있는 연결 고리를 만들어야 한다. 당시엔 그림을 들고 다니면서 손님들에게 영업을 했다. 가정집은 아무에게나 문을 열어주지 않으니 기존 고객이 없는 내가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사람은 변호사나 의사처럼 개인 사무실을 열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손님은.

“1978년 크리스마스 이브 오후에 작고한 황석연 변호사 사무실을 찾았다. 누나 황윤석 판사와 함께 남매 법관으로 유명했던 분이다. 황석연 변호사가 ‘오늘 같은 날 일을 하다니 인상 깊다’면서 그림 몇 점을 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해 12월 31일에 그 사무실에서 그림 석 점을 팔았다. 8만원 이문이 남았는데 그게 내 첫 실적이었다. 정월 초하루 같은 명절날 비즈니스가 더 잘 된다는 걸 그때 배웠다. 우리 고객은 평소에 굉장히 바쁜 분들이라 명절날 오히려 한가한 편이다.”

―고객들에게서 배운 것도 있나.

“공부해야 한다는 걸 배웠다. 나보다 인생 선배에다 책을 많이 읽은 분들이었다. 굉장히 유식했다. 내가 그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건 성실하고 솔직한 것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고미술 공부를 한 것도 그즈음이다. 남보다 많이 아는 게 재산이 된다고 생각했다.”

1983년 이호재는 고려화랑을 그만두고 서울 인사동에 열다섯 평짜리 공간을 세 얻어 ‘가나화랑’이라고 이름 붙였다. 그는 “남이 안 하는 해외시장을 겨냥해야겠다 생각했다. 외국인들이 부르기 쉽도록 받침 없는 이름을 고민하다가 ‘처음부터 새로 시작한다’는 뜻에서 ‘가나다라’의 첫 두 글자를 따 이름지었다”고 했다.

―해외시장 겨냥의 성과가 있었나.

“1985년 3월 ‘인상파와 현대 걸작전’을 열었다. 다니엘 말링규라는 파리의 유명 화상에게서 세잔, 모네, 르누아르 등 작품 20여 점을 빌려왔다. 많이 팔리지는 않았다.”

―해외 화랑이나 작가들과 네트워크는 어떻게 쌓았나.

“무조건 찾아갔다. 고려화랑을 그만둘 때 받은 돈으로 1999달러짜리 북반구 일주 왕복 티켓을 두 장 샀다. 서른 살 때였는데 무작정 파리에 갔다. 말링규라는 사람이 파리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하니까 그냥 찾아갔다. 거기에서 ‘나 한국에서 화랑 하는데 좀 도와달라’고 했다.”

―그게 통하던가.

“원래 일은 ‘큰 사람’하고 하는 게 좋다. 일이 훨씬 심플하게 풀린다.”

―말링규가 어떻게 도와주던가.

“당시 그가 일본에 로댕 작품을 팔았다. 내가 그 작품 운반책을 했다. 그걸 하다 보니 나중에 파리 로댕 미술관과 친해졌다. 로댕 작품이 사업 가치가 있다는 걸 알게 돼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 전역에 로댕 작품을 팔 권리를 얻게 됐다.”

1983년 파리에서 열렸던 아트페어 FIAC 행사장을 찾은 이호재 회장.

―유럽에서 손꼽히는 미술관을 가진 매그 재단과도 친분을 맺었다고 들었다.

“미술 시장이라는 게 좁다. 말링규가 빌려준 작품으로 연 인상파 전시 도록을 매그에게 보여주면 그게 신용 보증 역할을 해 또 작품을 빌리게 되는 식이었다. 매그 재단과 맺은 인연으로 샤갈, 미로 등의 전시를 열 수 있었다.”

―‘전설의 화상’이라는 뉴욕의 레오 카스텔리, 스위스의 바이엘러 등과도 왕래가 있었는데.

“1985년 여름 조각가 세자르를 만나러 남프랑스의 생폴드방스에 갔더니 어느 식당에 데려가더라. 그 식당에서 휴가 와 있던 레오 카스텔리를 만났다. 그때부터 매년 여름 레오 카스텔리를 만나러 생폴드방스에 갔다. 카스텔리 소개로 미국의 대표적 팝 아트 작가인 재스퍼 존스와 로이 리히텐슈타인 전시를 1991년 열었다. 역시 생폴드방스에서 만난 바이엘러의 소개로 색면추상의 거장 마크 로스코 전시를 1993년 열 수 있었다.”

―어떻게 화랑계 거물들의 호감을 살 수 있었나.

“거기에 한국 화상이라곤 나밖에 없었으니까. 게다가 내가 어리니까 굉장히 좋아하고 편하게 대해줬다. 아까 말했듯 큰 사람들은 심플하다. 바이엘러는 내게 어떻게 화랑을 경영해야 하는지도 알려줬다. ‘화랑은 결국 작가다. 갖고 있던 작품이 비싸지면 그걸 팔아서 마음에 드는 젊은 작가 한두 명에게 전폭 투자해라. 작품이 돈이 되면 그걸 팔아서 돈을 만들지 말고 작가를 키우라’고 했다. 그 말이 내게 굉장히 쇼킹하게 들렸다.”

“그림은 조금 무리해서 사라”

세계적 화상의 조언은 젊은 이호재에게 큰 자극이 됐다. 그가 국내 화랑 중 처음으로 전속 작가제를 실시하고 작가들에게 작업 공간을 제공한 것도 바이엘러의 영향이 크다. 이호재는 “화랑주(主)의 가장 큰 미덕은 작가를 남기는 거다. 작가와 화랑은 항상 경쟁 관계라 한쪽이 크는 만큼 다른 한쪽이 따라와줘야 한다”고 말했다. 9남매의 여섯째인 그는 가나아트센터와 서울옥션을 가족 기업으로 키웠다. 현재 막내 여동생 이옥경이 서울옥션 대표이사 부회장을, 장남 이정용이 가나아트센터 대표를 맡고 있다.

―좋은 그림이란 어떤 그림인가.

“‘오래 남을 그림’을 좋은 그림이라고 본다면 미술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 거다. 그런데 그냥 ‘좋은 그림’이라고 한다면 자기 마음에 드는 그림이면 된다고 생각한다. 다만 작가나 화상처럼 미술계를 이끌어가는 사람은 그림에 대해 종합적인 안목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다면 돈 되는 그림은.

“작가의 대표작이다. 그런 그림은 비싸더라도 언젠가 대우를 받는다. 고객에게는 작품을 살 때 ‘가능하다면 염두에 둔 가격보다 한두 단계 더 무리해서 사라’고 권한다. 그러면 작품 구입에 대한 기준이 생겨서 그보다 못한 작품은 눈에 안 들어오게 된다.”

―삼성가(家)는 고객으로 어떤가.

“그분들은 ‘많이 아는 고객’이다. 전문적이고 깊이 들어가는 분들이다. 그런 고객이 한두 분만 더 있었다면 한국 미술 시장이 훨씬 발전했을 거다.”

―당신에게 그림이란 뭔가.

“인연이다. 나는 그림을 파는 사람이지만 그를 통해 작가, 화상, 컬렉터 등 수많은 사람을 만났다.”

세 시간여 마주 앉아 있는 동안 이호재의 나긋나긋한 음성은 지루할 정도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한국 미술 시장이 커져야 한다’ ‘미술품 가격이 국격이다.’…. 새마을운동 구호 같은 그 말들에서 선진국 미술 시장에 대한 동경을 동력 삼아 이국(異國)에서 고군분투했다는 30여 년 전의 그가 엿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