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음악회 연주곡은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이었다. 이 곡 마지막 악장은 '환희의 송가'다. 거기에 "기쁨이여 쾌락이여… 형제여 그대의 길을 가라. 승리를 향해 나아가는 영웅처럼"이라는 가사가 나온다. 노랫말과 달리 지휘자 정명훈은 밝아 보이지 않았다.
▶그날 아침 신문들은 경찰이 정명훈 아내 구모씨를 불구속 입건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구씨가 서울시향 내분 사태와 관련해 직원들에게 시향 전(前) 대표를 헐뜯는 호소문을 만들어 돌리도록 시켰다는 혐의였다. 다음 날 서울시향 이사회는 정명훈과의 재계약을 보류했다. 정명훈은 서울시향 음악감독직을 내려놓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어젯밤, 그는 예술의전당에서 똑같은 곡으로 마지막 지휘를 했다. 연주가 끝난 후 단원들과 일일이 악수를 하고 청중에게 손을 흔든 뒤 떠났다.
▶지휘자를 흔히 '마에스트로'라고 한다. 거장 또는 선생님을 뜻하는 이탈리아 말이다. 정명훈은 악보를 보지 않고 지휘한다. 한 시간 넘는 대작(大作) 교향악도 사전에 악보를 모두 외울 만큼 준비에 철저하다. 그의 이런 자세는 단원들에게도 긴장과 자극을 줬고 그 결과 서울시향을 몇 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덕분에 클래식은 시민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서울시향 사태는 작년 말 서울시향 전 대표가 "정명훈이 시향 조직과 예산 면에서 독단적 권력을 휘둘렀다"고 밝히면서 불거졌다. 정명훈의 몇몇 흠은 그가 공(公)과 사(私)를 구분하고 자신에게 더 엄격했더라면 남지 않았을 것들이다. 그러나 이것이 정명훈 같은 세계적 지휘자를 이렇듯 씁쓸하게 떠나보내는 이유가 돼야 하는지 안타깝다. 베를린 필을 30년 넘게 지휘한 카라얀은 '카라야누스코프'라고 불렸다. 카라얀과 야누스를 합친 말이다. 뛰어난 음악가와 야심가의 두 얼굴을 가졌다는 뜻이다.
▶그는 마흔일곱에 베를린 필 음악감독으로 들어가며 종신 계약을 요구했다. 주로 오스트리아에 살며 지휘가 있을 때만 베를린에 나타나 사보이, 켐핀스키 같은 특급 호텔 스위트룸에 묵었다. 1963년 베를린 필 음악당을 지을 땐 지휘자 사무실 곁에 욕실 딸린 전용 휴게실을 만들어달라고 요구했다. 그때마다 논란이 있었지만 베를린 시민, 아니 독일인들은 카라얀을 받아들였다. "지구상 어디를 가도 베를린 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것만으로도 카라얀은 제 몫을 다하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가 정명훈 같은 지휘자를 다시 가지려면 많은 세월이 필요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