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면 분홍, 아들이면 파랑'이란 고정관념, 이제 버릴 때가 왔다. 미국의 글로벌 색채 전문기업 '팬톤'이 이달 초 '2016년의 색'으로 분홍색(로즈쿼츠)과 하늘색(세레니티)이 섞인 조합을 발표했다. 팬톤은 "패션, 디자인 등 세계 여러 분야에서 성(性)의 구별이 모호해지고 있으며 이 경향은 색채에도 영향을 미친다"며 "성평등, 성다양성 등 사회적 변화와도 관련 있다"고 했다. '올해의 색'으로 두 가지 색상을 선택한 것은 이번이 처음. 팬톤은 두 색상의 경계를 흐린 채 마치 하나의 색상처럼 선보였다.

남자들이여, 분홍을 입어라

팬톤의 예측은 벌써 실현되고 있다. 올해 가요계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20대 남자들은 '분홍'을 택했다. 빅뱅의 지드래곤, 블락비의 지코는 머리를 분홍색으로 물들였고, 혁오밴드의 오혁은 분홍색 재킷과 바지를 위아래로 맞춰 입고 무대에 올랐다. 반면 걸그룹 EXID의 하니는 최근 파란색에 가까운 녹색으로 염색한 머리를 선보였다. 새로운 세대에게 색(色)에 대한 성적(性的) 구분은 이미 무의미하다.

에트로 2016 봄·여름 남성복(왼쪽). 마이클 코어스 컬렉션 2016 봄·여름 여성복.

패션이나 화장을 통해 이미 색에 대해 유연해진 여자들과 달리 남자들은 분홍색을 남성성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인다. 하지만 국내 패션브랜드의 관계자들은 "보라색이나 분홍색, 주황색 등이 최근 젊은 남성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고 있다. 이런 색상을 당당함, 자신감의 표현으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했다. 구찌, 아크네 스튜디오, 에트로와 앤더슨 벨 등 국내외 브랜드를 막론하고 내년 봄·여름 남성복 컬렉션에서도 분홍색이 눈에 띈다. 마이클 코어스, 스티브J&요니P, 프리마돈나에서 선보인 여성복에는 분홍색과 하늘색이 자유로이 섞여 있다. 미국 최대 화장품 유통매장인 '세포라'는 팬톤과 손을 잡고 분홍과 하늘색 립스틱을 내놨다.

분홍색 입는 것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다. 약간 빛바랜 분홍색에 가까운 이 색은 하늘색은 물론이고, 옅은 풀색, 시멘트색, 아몬드색 등 채도와 명도가 낮은 색상과 잘 어울린다. 점잖으면서도 젊은 느낌을 낼 수 있다. 지난 19일 방영된 '응답하라 1988'(tvN)에서 정봉이가 분홍색을 소화한 방식이 따라 하기도 쉽고 무난하다. 여자친구에게 선물 받은 핑크셔츠 밑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네이비색 재킷을 걸치자 지적이면서도 사랑스러운 '봉블리'가 됐다.

①플레이노모어의 여성용 가방. ②'핑크 쿼츠'를 이용해 만든 프레드의 반지. ③세포라와 팬톤이 협업으로 내놓은 립스틱. ④앤더슨 벨의 남녀 공용 스웨터. ⑤토즈의 드라이빙 슈즈.

분홍색과 하늘색에서 위로를

'세계 색채 권위자'(월스트리트저널, 뉴욕타임스)라 불리는 팬톤이 2000년부터 매년 발표하는 '올해의 색'은 패션·화장품·인테리어·디자인 산업에 큰 영향을 미친다. 2015년 색이었던 '마르살라'(붉은 와인색)는 패션과 인테리어에서 유행했고, 하반기 화장품 업계에서는 품절 사태가 일어날 만큼 최고 인기 상품으로 떠올랐다. 팬톤은 1963년 로렌스 허버트가 창립한 미국의 색채연구소이자 색상 회사. 수많은 색에 고유번호를 붙여 만든 '팬톤 컬러매칭시스템'으로 유명하며 각종 시각예술 분야뿐 아니라 디지털 기술, 건축, 패션, 도료 등 산업 전반에서 표준색채언어로 사용되고 있다.

팬톤이 파스텔 계열 색상을 올해의 색으로 정한 것은 2006년 이후 처음이다. 이런 이례적인 색상 선정은 테러나 경제 위기를 직면한 '불확실의 시대'를 고려한 면도 있다. 분홍색은 따뜻하게 감싸 안고 하늘색은 안정적이고 침착하다. 팬턴이 이번에 분홍과 하늘색 두 가지를 융합해 내놓은 것은 불안과 피로에 지친 사람들에게 공감과 휴식을 주고, 갈등을 봉합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내년 국회의원 선거 유세에 빨간색과 파란색 대신 분홍색과 하늘색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