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판만 두드리고, 스마트폰에서 '좋아요' '공유하기'만 맨날 눌러서 그런가. 노트에 글씨를 쓰다 보면 마음이 차분해져요."

유럽 중세의 수도사나 옛 선비들처럼 성경이나 동서양 고전, 시·소설을 필사(筆寫)하는 사람이 최근 부쩍 늘었다. 과거에는 경전 공부나 암기, 지식의 전수를 위한 것이었다면, 요즘은 힐링(위안)의 시간을 갖기 위한 경우가 많다. '어린 왕자'나 '데미안' 같은 작품에 나오는 성찰(省察)적인 문장을 따라 쓰며 자신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직장인 김경란(28)씨는 "노트의 빈 공간을 채워 가다 보면 종일 모니터만 쳐다보는 데 지친 눈과 뇌가 휴식을 취하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어린 왕자’ 필사책. 문장을 베껴 쓰면서 힐링의 시간을 갖는다.

서점에는 필사책이 쏟아져 나오는 중이다. 인터넷 서점 예스24에서 집계해본 결과, 필사 관련 서적의 판매량은 올 하반기 들어서만 상반기보다 17.5배나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베껴 쓰기용 텍스트도 사춘기 소녀풍의 시(詩)나 성경 일색에서 가정살림·예술·인문 등으로 분야가 다양해졌다. 독자층은 30~40대 남성들까지 확대되고 있다. 이달 들어선 '플라톤의 대화' '세네카의 행복론'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의 문장이 페이지마다 한쪽 귀퉁이에 작게 인쇄된 필사 다이어리(숲)가 출간되기도 했다.

올 8월 이후에만 '명작 속 추억을 쓰다'(인디고), '필사의 힘:데미안 따라 쓰기'(미르북컴퍼니) 등 20종 이상 나왔다.

사람들이 왜 갑자기 펜을 들고 나선 것일까. 출판전문가 표정훈 한양대 특임교수는 "우리 일상 활동의 많은 부분이 사이버 공간으로 옮겨 오면서 실제 몸을 움직이고, 오감(五感)을 활용하는 활동을 더 원하게 됐다"며 "최근 컴퓨터 그래픽 대신 직접 손으로 쓰는 캘리그라피 애호가들도 많아졌다"고 말했다. 대형서점마다 문구 매장을 확대해온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필사책이라고 그냥 만드는 것은 아니다. 도서출판 숲은 필사 책 전용으로 번역을 새로 맡기고 페이지 디자인은 특허까지 받았다. 이 출판사 강규순 대표는 "좀 더 깊이 있는 독서 체험의 한 방법으로 필사를 선택하는 분도 많다"며 "필사용이라고 해서 책의 내용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최근 '필사 마니아' 대열에 합류한 탤런트 류진은 "평소 고전 공부를 한번 해보자는 마음만 있고 시작을 못 했는데, 마침 필사책을 선물 받아 매일 조금씩 쓰고 있다"며 "늦은 시간 책상에 앉아 노트를 마주하고 있으면 학창 시절 이후 잊었던 필기의 즐거움을 되찾은 느낌"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