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후반 파리에서 고달프게 작업했어요. 그림을 포기해야 하나 갈림길에 있을 때 김향안(1916~2004·김환기 화백의 부인) 여사가 파리 7구의 아파트에서 연 그룹전에 초대해 주셨어요. 넉넉지 않은 살림에 그림도 사주셨지요. 그때가 김환기 선생이 돌아가시고 여사님이 파리에 환기재단을 막 세웠을 때였어요."

작품‘걷는 사람’사이에 앉은 진유영 작가. 사람의 발을 카메라로 찍어 화소를 분해한 다음 물감으로 채색한 그림이다.

환기미술관에서 개인전 '빛 위에 그리다'를 열고 있는 재불 작가 진유영(69)씨가 김향안 여사를 회상했다. 환기미술관은 김향안 여사가 김환기 선생을 기리기 위해 1992년 만든 미술관. 김 여사를 '인생의 은인'으로 여기는 작가는 보답이라도 하듯 그의 숨결이 묻어 있는 전시실에 화업 45년을 옹골차게 풀어놨다. 회화부터 동영상까지 작품 100여 점이 전시됐다.

진 작가는 서울대 미대를 졸업하고 1969년 국비 미술장학생 1호로 파리로 유학 갔다. 이후 줄곧 파리에 살며 작업을 이어왔다. 건축가 우규승씨가 설계한 전시장에 들어서면 모네의 유화 '생라자르 역'의 유리창을 연상케 하는 작품이 나온다. 작가가 실제 기차역을 찍어 디지털화한 다음, 확대해 화소의 흔적을 지우며 윤곽 위를 물감으로 칠해 역광 효과를 표현했다. 디지털과 아날로그, 사진과 회화를 오가는 작업 과정에서 빛이 자연스레 작품에 스며들었다. 이렇게 해서 서대문형무소의 창틈으로 들어온 빛을 포착해 캔버스에 담기도 했다. 작가는 "빛이라는 진리 앞에 진실한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며 "시행착오 끝에 빛은 그리지 않을 때 더 빛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고 했다. 전시 31일까지. (02)391-77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