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공을 가로지르는 조타실에서 울림 가득한 목소리로 처음 등장한 베이스 연광철(달란트)은 날아가는 극에 묵직한 추를 달아주는 노르웨이인 선장 그 자체였다. '작은 거인'답게 포근하고 힘찬 저음(低音)으로, 막대한 부를 지닌 '네덜란드인'을 살살 꼬드겨 하나뿐인 딸 젠타와의 결혼을 밀어붙이는 달란트의 기회주의적인 면모를 설득력 있게 그려냈다.

3막에서 젠타(가운데·마누엘라 울)가 아버지 달란트(연광철)가 지켜보는 가운데 떠나가버린‘네덜란드인’을 향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바다로 뛰어들 결심을 하고 있다.

18~22일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서 세 차례 열린 국립오페라단(예술감독 김학민) 오페라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은 바그너의 사실상 첫 번째 오페라다. 신성을 모독한 죄로 영원히 바다를 떠돌아야 하는 저주를 받은 유령선 선장 '네덜란드인'이 젠타의 진실한 사랑을 얻어 구원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바그너가 하이네의 이야기 묶음집 '폰 슈나벨레봅스키의 회상' 등에 나오는 이야기를 새롭게 손질해 대본을 쓰고, 1839년 리가에서 북해를 거쳐 런던으로 가는 동안 겪었던 폭풍우를 바탕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는 곡을 만들어 붙였다.

연출가 스티븐 로리스는 무대를 20세기 언젠가, 바다에서 고래를 잡아 가공하는 통조림 공장으로 바꿨다. 막을 올리기 전, 풍랑이 거칠게 이는 바다 영상을 서곡 연주 부분에 포개 현장감을 살렸다.

7년에 단 한 번 육지에 오를 수 있는 '네덜란드인'은 이때 자신을 변함없이 사랑해 줄 수 있는 여인을 꼭 찾아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 1막에서 '네덜란드인'이 어마어마한 보석을 보여주자 달란트는 냉큼 자신의 사위가 되어도 좋다고 허락한다. 까만 돛대에 핏빛 돛을 달고 우울한 표정으로 불가능한 사랑을 갈구하는 바리톤 유카 라질라이넨(네덜란드인)과 탐욕에 눈멀어 기꺼이 딸을 내놓겠다는 연광철이 주고받는 이중창이 이목을 사로잡았다.

2막에서 소프라노 마누엘라 울(젠타)의 화려하면서도 울부짖는 듯한 아리아도 좋았다. 무대를 꽉 채운 철벽, 철기둥, 철문은 세속적인 마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외톨이처럼 겉도는 젠타의 출구 없는 외로움을 빗댔으나 장면 전환이 거의 없어 살짝 지루한 감이 들었다. 랄프 바이커트가 지휘한 코리안심포니오케스트라는 후반으로 갈수록 자리를 찾아갔다. 젠타를 사랑하는 테너 김석철(에릭)이 '네덜란드인'과 결혼하려는 젠타를 말리며 토해내는 목소리에선 안타까움이 애절하게 묻어났다. 3막의 마지막, 바다로 몸을 던진 젠타 위로 집채만 한 파도가 그녀를 집어삼키는 영상을 덧씌워 막을 내리는 장면은 여운을 남겼다.

세상을 떠도는 남자, 여인의 사랑에서 구원을 얻는 숙명, 그럼에도 어긋나는 남녀의 본성은 이후 바그너의 오페라에서 줄기차게 거듭되는 레퍼토리다. 연광철과 김석철의 탄탄한 가창력과 연기만으로도 충분히 만족도 높은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