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金泳三) 전 대통령은 1990년 3당 합당 이전까지 줄곧 '민주투사'로 한 길을 걸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그의 말은 민주화를 열망하는 국민의 뜻을 대변했다.
◇기록의 사나이
1927년 경남 거제에서 태어난 김 전 대통령은 경남중 재학시절 하숙집 책상에 '미래의 대통령 김영삼'이라는 글을 써붙이고 대통령 꿈을 키웠다. 김 전 대통령은 "일제시대 때는 소설가가 되려 했지만 해방된 후 대통령 꿈을 갖게 됐다"고 했다. 1948년 서울대 철학과에 입학했지만 1950년 6·25가 발발, 1951년에는 학도의용군에 입대했다.
1951년 장택상 총리 비서로 정계에 입문한 김 전 대통령은 1954년 총선에서 여당인 자유당 소속으로 당선됐다. 당시 나이 26세로 최연소 국회의원 당선 기록은 지금도 깨지지 않았다. 제3대 총선 당선을 시작으로 1980년대 정치규제 조치로 출마하지 못한 11,12대 총선을 제외하면 1992년 총선까지 모두 아홉번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이것도 최다선(最多選) 기록이다.
1954년 이승만 대통령이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안을 통과시키자 자유당을 탈당했다. 이렇게 시작된 그의 야당생활은 1990년 3당 합당때까지 줄곧 이어졌다.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군정참여 제의를 거절했던 김 전 대통령은 1963년 군정연장 반대 시위 참여로 구속됐다. 그는 "당시 구속 때는 면회도 많이 와서 할만 했는데 1980년대 가택연금 때는 답답해 못하겠더라"고 회고했다. 한일회담 반대시위가 벌어졌던 1965년 민중당 원내총무를 시작으로 야당에서 대변인 2회, 원내총무 5회를 지내며 정치적 체급을 키웠다.
1967년 신민당 창당에 참여했던 김 전 대통령은 1971년 대선을 앞두고 김대중,이철승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주창했다. 2차 결선투표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패하고 말았지만 "김대중씨의 승리는 곧 나의 승리"라며 경선 결과에 승복했고 이는 '아름다운 승복'으로 후일까지 그의 정치적 자산이 됐다.
1974년 당시 최연소였던 47세 나이에 야당인 신민당 총재가 된 김 전 대통령은 '반유신(反維新)' '선명야당'의 기치를 들었다. 신민당을 개헌추진본부 체제로 전환해 전국적인 개헌운동을 전개했다. 1976년 당 총재 경선에서 이철승에게 패했지만 1979년 5월 다시 당 총재로 복귀했다.
야당 총재로 반유신 운동을 지휘했던 김 전 대통령은 YH여공 신민당사 농성사건 이후 총재직을 박탈당했고 의원직에서까지 제명되는 등 정치적 탄압을 받았다. 그의 의원직 제명은 '부마항쟁'으로 이어졌고 그해 10월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로 유신시대는 막을 내렸다.
◇목숨을 건 반독재 투쟁
1980년 짧았던 '서울의 봄'을 지냈지만 김 전 대통령은 1980년 신군부의 '5.17 조치'로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가택연금 당했다. 1983년 광주항쟁 3주년을 맞아 23일간의 목숨을 건 단식 투쟁을 벌였다. 전두환 정권의 출국 권유에 "나를 해외로 보내려면 시체로 만든 뒤 보내라"며 거절했다.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1984년 민주화추진협의회 만들고 1985년 신민당을 창당하면서 다시 '민주투사'로 정치 전면에 나섰다. 신민당은 1985년 2.12총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다.
김 전 대통령은 이후 직선제 개헌 범국민운동을 주도하며 반독재 투쟁을 전면에서 지휘했고 직선제 개헌을 위한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다. 그렇게 쟁취했던 대통령 직선제로 치러진 1987년 대선에서 김 전 대통령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의 단일화에 실패, 통일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해 2위(28%)로 낙선했다.
김영삼,김대중 전 대통령은 단일화 실패와 대선 패배 이후 정계은퇴 압력을 동시에 받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1988년 총선에서 각각 통일민주당과 평화민주당을 이끌며 영남과 호남 지역의 맹주임을 확인하며 여소야대(與小野大) 국회를 만들었다. 그러나 김 전 대통령의 통일민주당은 평화민주당에 밀린 '제2야당'이 됐고 이런 정치적 상황은 그를 1990년 3당 합당의 결단을 내리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