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기관에서 조금이라도 사줘, 빨간색이야 파란색이야?'(작전세력)
'보람이 빨간색 입었었잖아'(김 모씨)
'친구야 보람이 찾아가야지~'(세력)
'당근~ 언제?'(김씨)
최근 구속 기소된 골드만삭스 전 상무 김 모(47)씨와 주식 작전세력인 안 모씨가 주고받은 휴대전화 문자메시지에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보람이'는 원래 이들의 단골인 강남 룸살롱 여종업원이었지만 여기에선 작전 대상 주식이나 뒷돈을 의미하는 은어로 사용됐다. 보람이가 빨간색 입었다는 것은 오늘 기관투자자들에게 주식을 사게 해서 주가가 올랐다는 의미였고, '보람이 찾아가야지'에서 보람이는 수고 대가로 뒷돈을 받아 가라는 뜻이었다.
김씨는 2011년 작전세력으로부터 8000만원을 받고 외국계 자산운용사에 근무하는 지인들을 동원해 동양피엔에프 주식을 매입해 주가를 끌어올린 혐의를 받고 있다. 기관이나 외국인이 주식을 사면 개인 투자자들은 그 주식을 우량주로 보게 되며 그때를 이용해 작전세력은 주식을 팔아버리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김씨의 범행은 이게 시작이었다. 그는 자신이 몸담고 있는 골드만삭스의 자금 운용 계획을 미리 입수했고, 여러 개의 차명계좌를 동원해 회사가 매입할 주식을 미리 사고팔았다. 2011년부터 2년간 골드만삭스가 매입할 예정이었던 서울반도체·에스원·후성 등 22개 종목을 회사보다 수십분 먼저 사고파는 '땅 짚고 헤엄치기'식 투자를 했다. 그는 이런 부정 거래로 15억원을 벌었다.
지난 8월 20일 첩보를 입수한 검찰이 골드만삭스 서울 본사를 압수수색 하자 금융가에선 여러 말이 나왔다. "설마 골드만삭스에서 그런 비리가 있겠느냐. 혹시 검찰이 잘못 짚은 것 아니냐"는 반응이 많았다. 골드만삭스 측도 여러 로펌을 통해 검찰에 이 같은 불만을 전달했다고 한다.
골드만삭스는 글로벌 금융시장을 주름잡는 세계 최대 투자은행으로 직원들의 투철한 준법성을 자랑으로 삼아왔다. 고객 돈을 굴리는 업체가 자신들의 이익부터 먼저 챙긴다면 아무도 돈을 맡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두 달 뒤 김씨의 범행이 모두 드러나자 골드만삭스 측은 미국 본사 법무팀과 내부통제팀 최고책임자 등과 협의를 거쳐 재발 방지 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심지어 김씨는 골드만삭스 사무실의 컴퓨터를 이용해 주식을 불법 매매했다. 미국 공군사관학교와 MBA를 나온 미국 국적자 김씨의 차명계좌에는 현금 수십억원이 들어 있었다. 펀드매니저가 회사 자금 운용 정보를 개인 주식 매매에 이용하다 적발된 것은 이번이 첫 사례였으며, 수사는 서울남부지검 증권범죄합동수사단의 막내이자 홍일점인 허윤희(33) 검사가 맡았다. 허 검사 등 합수단은 골드만삭스 압수수색에서 확보한 800GB(기가바이트)가 넘는 펀드 매매 내역과 김씨의 증권 거래 내역을 일일이 대조하는 과정에서 김씨의 불법 거래를 찾아냈다고 한다.
남부지검, 금융·증권 수사의 메카로
올해 초 금융·증권 사건 중점 수사기관으로 지정된 서울남부지검이 활발한 수사로 관심을 모으고 있다. '넘버1' 지방검찰청인 서울중앙지검이 포스코 사건과 해외자원개발 비리 사건 등으로 주춤한 반면 남부지검 수사는 별다른 잡음 없이 매끄럽게 진행됐다. 특히 남부지검은 그동안 수사 사각지대로 여겨져 왔던 글로벌 투자은행의 비리를 파헤치는 데 수사력을 모으고 있다.
남부지검은 최근 일본계 증권사인 다이와 증권을 압수수색해 이 회사의 전 이사 한 모(44)씨를 구속했다. 한씨는 다이와 증권에 재직하던 2010년 8월 작전세력에게 1억원을 받고 코스닥 기업인 티플랙스 주식 12만주를 자신이 아는 펀드매니저를 통해 매각한 혐의를 받고 있다.
같은 일본계 투자업체인 SBI그룹도 올해 초 혼쭐이 났다. 이 그룹 전 계열사 대표인 윤 모(41·구속 기소)씨가 투자 대가로 5개 업체로부터 3억9000만원을 챙긴 사실이 적발됐기 때문이다. SBI의 경우 국민연금 투자를 대행하면서 이 같은 범죄를 저질러 금융계에 충격을 줬다.
김형준(45) 증권범죄합수단장은 "얼마 전만 해도 외국계 투자 은행 사이에선 '한국 수사 기관이 어떻게 우리를 수사하겠느냐'는 인식이 팽배해있었다"면서 "국내 업체든 외국계 업체든 성역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야 금융 질서가 바로잡히게 된다"고 했다. SBI 측은 수사 초기 회사 자체 감시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에 구조적 비리가 있을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윤씨의 모럴 해저드가 드러나면서 "다시는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사과했다.
쟁쟁한 검사들 많아
검찰은 지난해부터 지방검찰청의 전문성을 높이기 위해서 분야별 중점 검찰청을 지정하고 있다. 서울서부지검은 '식품의약안전 중점 검찰청', 울산지검은 '산업안전 중점 검찰청', 대전지검은 '지식재산권 분야 중점 검찰청'으로 지정됐다. 그리고 올해 2월부터는 서울남부지검을 금융범죄 중점 검찰청으로 지정하면서 서울중앙지검에 있던 금융조사 1·2부를 남부지검으로 이관했다. 금융조사부는 2004년 서울중앙지검에 처음으로 만들어졌고 요즘은 검사들에게 최고 인기 부서가 됐다. 여기에 서울중앙지검에 설치돼 있던 증권범죄합수단까지 넘어가면서 남부지검은 금융증권범죄 수사의 메카로 불리고 있다. 언론 관심도 높아져 일부 경제 매체들은 대검이나 서울중앙지검보다 남부지검에 더 많은 취재 인력을 배치하고 있다.
남부지검의 사령탑은 오세인(50) 지검장이다. 강원도 양양 출신인 오 지검장은 대검 공안기획관과 서울중앙지검 2차장을 역임한 대표적 '공안통'으로 대검 중수부장 후신인 대검 반부패부장과 공안부장 등 요직을 거쳐 남부지검장으로 왔다. 그는 차기 검찰총장 후보로 결정된 김수남 총장 체제에서도 중용될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꼼꼼하고 일 욕심 많은 오 지검장은 부임 당시 기자와의 통화에서 "과연 잘할 수 있을지, 금융증권 사건 중점청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조직으로 만들 수 있을지 걱정이 많다"고 했다.
오 지검장 아래 주요 '장수'들의 이력도 눈길을 끈다. 문찬석(55) 2차장 검사는 증권 금융범죄 수사를 총괄 지휘하고 있다. 2013년 초대 증권범죄합수단장을 지내는 등 기업과 금융 수사에서 잔뼈가 굵었다. 문 차장은 2001년 특수부 검사 시절 '리타워텍' 주가조작 사건의 주임 검사였다. 리타워텍은 작전주의 전설로 불리는 코스닥 기업이다. 2000년 4월 1800원 하던 주가가 넉 달 만에 36만원까지 200배 올랐다. 문 차장은 이 사건을 깔끔히 처리하며 작전세력 사이에서 요주의 인물이 됐다. 그는 국내 검사 가운데 최초로 '시세조종' 부문에서 '전문검사' 칭호를 얻었다.
남부지검의 주력으로 45명의 수사 인력이 배치된 증권범죄합수단은 김형준 부장검사가 이끌고 있다. 김 검사는 서울중앙지검 금융조사부, 삼성비자금특별수사본부에서 근무했고 재작년엔 전두환 전 대통령 추징금 환수팀장을 맡아 유명세를 탔다. 2008년 초 리먼 브러더스를 압수수색 하는 등 글로벌 투자 은행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검사로 알려져 있다. 2013년 5월 출범한 증권범죄합수단은 지금까지 주가조작 사범 200명을 구속 기소하고 185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금융조사1, 2부장을 각각 맡고 있는 박찬호(49) 부장검사와 이진동(47) 부장검사도 '독종'으로 소문났다. 박 검사는 철학(전남대)을, 이 검사는 생화학(연세대)을 전공했다. 박 검사는 서울중앙지검 특수3부장을 지낸 특수통 검사다. 그는 지난 7월엔 2000년대 초반 권력형 비리 사건인 '이용호 게이트'의 이용호(57) 전 G&G 회장을 횡령 혐의로 구속해 재판에 넘겼고, 같은 달 코스닥 기업인 씨씨에스 그룹 유홍무 회장을 주가조작 혐의로 구속했다.
이진동 검사는 2005년 국정원 도청(盜聽) 사건 수사팀에서 신건 전 국정원장을 구속시킨 검사다. 당시 국정원 도청 의혹을 최초 보도한 조선일보 이진동 기자와 동명이인으로 '두 명의 진동이 나라를 진동시켰다'는 농담이 회자됐었다. 이 검사는 최근 기관 투자자들의 미공개 정보 이용 의혹이 제기된 한미약품 사건을 지휘하고 있다.
오세인 지검장은 "1년 가까이 금융시장 내면을 들여다보니 불공정 거래 행위가 생각보다 훨씬 심각했다"면서 "피해를 입게 되는 개인 투자자를 보호하기 위해 자본시장 질서를 바로잡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