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3일 역사 교과서 국정화 확정 고시를 하고 야당이 이에 반발해 국회 일정을 보이콧하면서 국회가 멈춰 섰다. 본회의 법안 처리와 예산결산특위의 내년도 예산안 심사, 상임위 법안 심사 등이 모두 중단됐다. 이날 국회 파행으로 본회의에서 처리될 예정이었던 36개 법안 처리가 무산됐다. 기업 간 인수·합병을 원활하게 하는 내용의 '상법 개정안', 알코올중독자에게 법원이 치료를 명령할 수 있게 하는 내용의 '치료감호법 일부개정법률안' 등은 여야 간에 다툼도 없는 법안들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은 4일과 5일 국회 일정도 보이콧하기로 해 국회 파행은 당분간 이어지게 됐다. 다만 여론의 역풍(逆風)도 의식하고 있어 파행이 장기화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새정치연합은 이날 오전 예정된 국회 본회의와 예결 특위, 상임위 등 모든 의사일정을 거부했다. 전날에 이어 국회 로텐더홀 농성도 자정까지 이어갔다. 야당의 보이콧으로 이날 예정됐던 김영석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는 연기됐다. 새정치연합은 이날 의원총회와 규탄대회를 열어 국정화 확정 고시를 성토했다. 문재인 대표는 "정부의 고시 강행은 자유민주주의의 파탄을 알리는 조종과 같고, 유신독재정권 시절에 있었던 긴급조치와 같다"며 "불법 행정을 강행하는 것은 독재"라고 했다. 의원들은 규탄문을 내고 "국정화 강행은 국민을 향한 선전포고"라며 국정화 철회, 황우여 사회부총리 사퇴, 박근혜 대통령 사과 등을 요구했다. 야당은 이날 밤 10시에도 60여명 의원이 모인 가운데 의총을 열고 향후 대응 방안에 대해 논의했다.

野 '국정화 철회' 규탄대회 -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3일 국회 본청 앞 계단에서 열린 당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규탄대회에 참석해 마이크를 잡고 발언을 하고 있다. 문대표 뒷줄에 (오른쪽부터) 정청래 최고위원, 주승용 최고위원, 이종걸 원내대표, 이석현 국회 부의장, 오영식 최고위원이 피켓을 들고 서 있다.

[문재인, "국정화 고시는 끝 아니라 시작, 역사교과서 지키는 싸움도 시작" ]

반면 새누리당은 이날 본회의를 앞두고 긴급 의원총회를 열어 '올바른 역사 교과서 만들기'와 '민생·경제활성화 법안 처리'를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이어 오전 10시에 맞춰 본회의장에 단독으로 입장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야당의 본회의 참여를 압박하면서 정의화 국회의장에게 "여당 단독으로라도 안건을 처리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정 의장은 여야 합의를 요청했고, 새누리당 의원들은 1시간여를 기다리다 회의장에서 나왔다. 김무성 대표는 "야당이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다"고 했다.

여야 의원들이 고성을 주고받는 상황도 있었다. 예결위원인 새누리당 김제식 의원이 야당이 의총을 하고 있던 예결위 회의장에 와서 "남의 회의장에서 뭐 하는 거냐"고 하자, 새정치연합 임수경 의원이 "남의 회의장이라니, 말을 가려서 하라"며 언쟁을 벌였다.

국회 파행으로 386조7000억원 규모의 내년도 예산안 심사에도 빨간불이 켜졌다. 예산안 처리 법정 시한(12월 2일)은 한 달도 남지 않았다. 새누리당은 "야당이 예산 심사를 거부하면 여당 단독으로라도 심사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경우 예산안에 대한 부실 심사가 우려된다. 파행 이후 국회가 정상화되더라도 여권의 중점 추진 정책인 '노동개혁' 관련 입법 등은 처리가 더 어려워질 것이란 관측도 있다. 야당이 교과서 국정화를 문제 삼으면서 주요 법안 처리에 협조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이다.

야당은 당분간 국회 정상화에 응하지 않을 태세다. 4일 예정된 강호인 국토교통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와 예결특위 예산 심사 등 상임위 일정에 참여하지 않기로 했다. 5일 본회의 개최도 어렵다는 입장이다. 새정치연합은 4일 문재인 대표 대국민 담화 발표, 5일 야당·시민단체 연석회의와 국회의원·지역위원장 연석회의, 6일 저녁 시민단체와 공동 장외집회 등의 투쟁 일정을 잡았다. 국정교과서 금지 입법을 추진하고, 장기전에 대비해 학계·시민단체 등과 함께 공동투쟁기구도 만들기로 했다.

다만 야당은 국회 보이콧이 '민생 발목 잡기'로 비칠 수 있다는 점에 대한 우려도 하고 있다. 이 때문에 국회 보이콧이 장기화해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당내에도 많다. 원내 핵심 관계자는 "정기국회를 장기간 전면 중단시키고 가는 건 현실적으로 부담"이라며 "이번 주는 규탄 주간으로 가더라도 이번 주말 또는 다음 주 초쯤에는 국회 정상화 가능성이 있다"고 했다. 이 때문에 주말 냉각기를 거쳐 다음 주 초에 여야 협상을 통해 국회가 정상화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