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4일 밤 10시 필리핀 마닐라의 'COD'(City Of Dreams) 카지노.

"한국인이시죠? 저는 부산서 왔어요." 흰색 티셔츠를 입은 깡마른 남자가 블랙잭 게임을 하는 한국 관광객 옆에 달라붙어 말을 걸었다. 관광객이 돈을 따면 더 신난 것처럼 보였다. 재떨이를 갖다주고 음료수가 떨어지면 대신 종업원을 불렀다. 그렇게 30분쯤 관광객 수발을 들던 남자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돈을 다 잃어 비행기표 값이 1000페소(약 2만5000원) 모자라는데 도와달라"고 했다. 원하던 돈을 얻자 서둘러 자리를 떴다. 하지만 그가 향한 곳은 다른 게임기 앞이었다.

나흘 뒤인 28일 밤 마닐라의 솔레어 카지노에서도 50대 한국인 남자가 기자 주위를 서성거렸다. 그는 "500페소만 빌려주실 수 있겠느냐"고 했다. "사실 마닐라에 온 지 3개월 됐는데, 돈이 다 떨어졌어요. 하루 자는 데 200페소, 먹는 데 300페소가 드는데 좀 도와주시면…."

필리핀 마닐라의 시티 오브 드림스(City Of Dreams) 카지노 입구. 이곳에선 도박하러 왔다가 돈을 탕진하고 구걸로 연명하는 한국인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필리핀 카지노에 도박하러 왔다가 가진 돈을 다 날린 뒤 현지 카지노들을 서성대며 '구걸'로 연명하는 한국인이 늘고 있다. 기자가 솔레어 카지노에서 만난 남자의 말에 따르면 한국 관광객이 많이 찾는 마닐라의 호텔 카지노는 6~7군데다. 이들 카지노 주변에서 100명 넘게 이런 사람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주로 마닐라에서 유흥가가 밀집해 있는 말라테 지역의 허름한 여인숙에서 지낸다고 한다. 이런 여인숙들은 과거 필리핀 선원들이 묵던 숙소다. 1박(泊)에 120~180페소면 몸을 뉠 수 있다. 이들 대부분은 이미 국내에 있는 가족이나 지인들로부터 돈을 빌려 쓸 만큼 쓴 상황이어서 돌아갈 비행기 삯은커녕 끼니를 때울 돈도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여인숙 방세도 못 내는 이들은 노숙자 쉼터로 흘러든다. 마닐라에서 한국인 노숙자 쉼터를 운영하는 '필리핀 112'의 이동활 대표는 "최근 5년간 150명쯤 되는 한국인이 노숙자 쉼터를 이용했는데, 상당수가 도박 폐인"이라 했다.

그래픽=김성규 기자

아예 바카라 게임을 직업으로 삼는 '생바'(생계형 바카라) 도박꾼도 적지 않다. 이들은 호텔보다 저렴한 아파트나 빌라를 잡고 매일 카지노로 출근한다. 이들은 하루 1만페소(25만원)를 따면 그날 게임을 접는 등 나름의 '업무 수칙'을 갖고 있지만, '생바'로 성공한 사람은 찾기 어렵다. 대부분 두세 달 만에 돈을 다 잃고 빈손으로 귀국하거나 관광객에게 빌붙어 산다.

'도박 폐인'들 가운데는 여자들도 있다. 이들은 해외 원정 도박을 왔다가 돈을 다 잃은 뒤, 몸을 팔아 번 돈을 들고 도박장에 나타난다는 것이다. 마카오에선 이런 여성들을 심심치 않게 목격할 수 있다. 카지노 에이전트 신모씨는 "마카오의 MGM, 샌즈, 갤럭시 등 호텔 카지노 주변을 배회하며 한국인과 중국인을 상대로 매춘을 해 번 돈으로 도박을 하는 여성들이 꽤 있다"고 했다. 마닐라에선 관광객들에게 한국인 매춘부를 소개해주는 '보도방'도 생겨났다. 마닐라에서 개인 사업을 하는 박모씨는 "원정 도박을 온 이들 가운데는 필리핀 여성보다 한국인 파트너를 찾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했다.

해외 도박을 하는 한국인은 한 해 22만6000명, 도박에 쓰는 돈은 2조2000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추산(경희대·닐슨 컴퍼니 코리아 조사, 2011년 말 기준)됐다. 마카오(18만5000명)와 필리핀(3만8000명)을 찾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당국은 4년 전보다 원정 도박자 수가 훨씬 늘어났을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