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가가 다 뭐예요! 집이 다 뭐예요! 죽자꾸나 농살 지어두 입엔 거미줄이 이는 세상이라구요. 대체 이 조선 땅에서 무얼 해 먹고 살아요? …이런 지옥에라도 이대로 죽으란 법은 없을 거예요."(연극 '토막' 중 청년 삼조의 대사)

테이크아웃 커피잔을 손에 든 채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며 '헬조선' 운운하는 오늘날의 청년들이 연극 '토막'(유치진 작, 김철리 연출)을 본다면 과연 진정한 '헬조선'이 무엇인지 목도할 수 있을 것이다. 도무지 희망이라곤 보이지 않는 일제 강점기의 처절한 삶이 그곳에 있다.

1930년대 사실주의 작품을 현대적인 무대 위에서 재해석한 국립극단 연극 ‘토막’.

주인공 명서네 가족은 다 쓰러져 가는 움막에 사는데, 가장 명서는 병자고 딸 금녀는 장애인이라 명서 처가 겨우 농사를 지어 근근이 삶을 꾸린다. 이웃 경선네는 굶어 죽지 않으려고 쌀을 꾸었다가 못 갚는 바람에 토막집마저 빼앗기고 문전걸식과 행상으로 끼니를 잇다 추운 겨울밤 정처 없이 고향을 떠난다. 명서의 유일한 바람은 일본에 돈 벌러 간 아들 명수가 돌아오는 것이지만, 그마저도 독립운동을 하다 옥사해 유골로 귀환한다.

사실주의 연극의 대가 유치진이 1932년 쓴 이 데뷔작은 국립극단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의 하나로 다시 무대에 서게 됐다. 현대 건물처럼 단순하게 디자인된 무대 위에서 펼쳐진 김철리의 연출은 무능한 가장, 생활력 강한 아내 같은 전형적인 인물 묘사의 각을 세웠다. 김정은(명서 처 역), 김경호(경선 역) 등 국립극단 단원들의 연기 밀도는 높았다.

마지막 장면, 뼛가루가 쏟아지는 처절함의 극한에서 '오빠의 혼이 우릴 저버리지 않을 것이니 꾹 참고 살아가자'는 금녀의 절규는 더 이상 추락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밑바닥에서 내뱉는 장엄한 의지와도 같았다. 여기서 원작에 없는 옷 잘 차려입은 남녀가 등장해 이 상황 자체를 무관심하게 바라보는 장면이 삽입됐는데, 작품을 다채롭게 만들기는 했지만 극의 주제가 모호해지는 약점을 낳았다. 민족의 수난과 저항을 말하던 비극이 갑자기 빈부 격차의 사회문제를 다루는 작품으로 바뀐 듯했다.

▷11월 1일까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 공연 시간 90분, 1644-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