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양(咸陽)은 이름이 남다릅니다. 중국 서안(西安)에서 서북쪽으로 25㎞ 떨어진 곳에 함양과 한자가 같은 고도(古都)가 있습니다. 중국 첫 통일국가 진(秦)의 수도였지요. 진시황이 살던 곳인데 우리 함양은 예부터 ‘좌안동 우함양’으로 불렸습니다. 흔히 뼈대있는 고장을 말할 때 ‘좌안동 우함양’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낙동강 동쪽 안동(安東)과 낙동강 서쪽 함양에서 훌륭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됐다는 뜻입니다. 함양의 대표 인물로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1450~1504)선생을 빼놓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눈길을 끄는게 ‘일두’라는 호(號)입니다. 풀이하자면 ‘한마리 좀벌레’라는 뜻인데 얼마나 자신을 낮추고 겸손하게 평생을 살아왔는지를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일두 정선생에 대해 조선의 쟁쟁한 유학자들은 다음과 같은 평가를 남겼습니다.
“남계(藍溪)서원에 이르서 재숙하고 이튿날 새벽에 일어나서 사당에 배알하였다. 물러나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우리나라 현인들 가운데 오직 이분만이 거의 흠이 없는 분일 것이다.” 이것은 남명(南冥) 조식(曺植·1501~1572)선생이 남긴 말입니다. “일찍이 선정(先正) 정공(鄭公) 휘 여창(汝昌)선생의 풍도를 들었지만 상세한 것을 알지 못해 참으로 부끄럽고 허전합니다. 그 저술과 행장을 갖고 계신다면 잠시 빌려 읽게 하여 무지하고 답답한 제 심정을 풀 수 있게 해주시면 천만다행이겠습니다.” 이것은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이 남긴 말입니다. 퇴계 선생이야 익히 알려졌지만 의롭지 못한 몸가짐을 할까 두려워 잘 때도 날이 시퍼런 검을 차고 있었다는 남명 선생이 이 같은 평가를 남긴 것을 보면 일두선생의 ‘그릇’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정여창 선생은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꼽히고있습니다. 동방오현은 우리나라가 배출한 다섯 뛰어난 현인을 말하는데 성균관(成均館) 대성전(大聖殿)에 위패를 모시고 있습니다. 일두 선생 외에 네분의 선비들을 보면 다 대표적인 유학자들입니다. 사옹(蓑翁) 김굉필(金宏弼·1454~1504), 정암(靜庵) 조광조(趙光祖·1482~1519),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 선생입니다. 중요한 것이 김굉필-정여창이 김종직(金宗直·1431~1492)선생의 제자라는 점입니다.
제가 앞서 조광조 선생 편에서 잠시 언급했듯 우리 성리학의 뿌리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되지만 조선조에선 김종직이라는 거대한 인물에게서 대부분의 학맥(學脈)이 발원하며 사화(士禍) 역시 ‘김종직’이라는 이름을 제외하면 설명할 길이 없게 됩니다. 일두선생의 삶을 살펴봅니다. 선생은 본관이 경남 하동인데 증조부 정지 대(代)에 처가 고향인 함양에서 살기 시작했습니다. 1450년 음력 5월5일 함양군 지곡면 개평리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정육을(鄭六乙), 어머니는 경주 최씨였습니다. 할아버지 정복주는 세조 때 재상 정인지와 팔촌지간인데 아버지 정육을이 일두가 8살일 때 의주판관(義州判官)으로 부임했을 때의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아버지를 따라 명나라 사신 장녕(張寧)을 만났는데 그가 일두의 비범함을 알아본 것이지요.
장녕은 어릴적 이름이 백욱(佰勖)이었던 일두를 본 뒤 “커서 집을 크게 번창하게 할 것이니 이름을 여창(汝昌)이라 하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가 18살 때 아버지 정육을은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병마우후(兵馬虞候)로 출전했다가 전사합니다. 이때 일두는 한달간 전쟁터를 돌며 끝내 아버지의 시신을 수습합니다. 세조는 일두를 가상히 여겨 아버지의 직책(의주판관)을 제수했지만 일두는 고사했습니다. 일두의 아버지는 적개원종공신(敵愾原從功臣)의 녹훈을 받습니다. 어머니 밑에서 홀로 독서하던 일두는 함양군수 김종직 문하(門下)로 들어가지요. 이때 함께 동문수학하던 친구가 김굉필입니다. 이들은 지리산에 들어가 3년간 오경(五經)과 성리학을 연구하는 ‘경명수행(經明修行)’으로 알려졌습니다. 이때의 친구가 김굉필 외에 송석충-정광필이며 사화의 빌미가 된 김일손도 있었지요. 여러번 벼슬길에 천거됐지만 사양하던 일두는 성종 21년(1490) 과거에 급제합니다. 일두는 동궁(東宮)이던 연산군을 보필했지만 대쪽 같은 일두와 성격이 맞을리 없지요.
훗날 연산군은 사화가 일어나자 자기 스승이었던 일두의 목숨을 빼앗았으니 기이한 인연입니다. 이런 저런 벼슬을 지내던 일두는 1498년 친구인 김일손의 사초(史草)로 시작된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이라는 이유로 함경도 종성에 유배됩니다. 유배지에서도 아이들을 가르치고 학문을 연마하던 그는 1504년 종성에서 병을 얻어 사망합니다. 여기서 ‘무오사화’를 짚어보고 갑니다. 무오사화는 당시 대립하던 훈구(勳舊)대신들과 신진사림의 세력 다툼에서 어처구니없게 일어났습니다. 발단은 신진사람파로 사간원에서 일하던 김일손(金馹孫)이 중신인 이극돈을 가축인 소(牛)에 비유하며 깔보는 글을 쓰면서 시작되지요. 이극돈은 지금으로 치면 중도보수인사로 비교적 당파성이 약했는데 자신을 젊은 김일손이 소에 빗대자 분노합니다. 그래서 김일손이 썼던 사초를 들여다보니 ‘성종실록’에 성종의 할아버지인 세조 때의 일이 들어가있고 김일손의 스승인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을 김일손이 수록하려했다는걸 알게되지요. 뭔가 증거를 찾으려는 이들에게 이것은 큰 수확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런 이극돈에게 희대의 간신 유자광이 가세해 연산군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연산군은 가뜩이나 신진사림들과 신경전을 펴왔기에 이 기회를 빌어 신진사림을 정리하려하지요. 이렇게 해서 한 문장에서 시작된 갈등이 대규모 숙청과 처형이라는 대참사로 이어집니다. 여기서 김종직이 쓴 '조의제문'은 '의제(義帝)에게 조의(弔意)를 표하는 글(文)'이라는 뜻입니다. 이 의제란 초한지의 주인공가운데 한명인 항우(項羽)가 회왕, 즉 훗날 의제를 살해해 물에 던지면서 비극적인 삶을 마치는 인물입니다. 이 글이 문제가 된 이유를 여러분도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中편에 계속>
Photo by 이서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