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우 연세대 석좌교수·前 금융위원장

한·중·일 동북아 3국의 산업 구조에는 두드러진 공통점이 있다. 바로 제조업에 비해 낙후된 금융업이다. 얼마 전 국제콘퍼런스에서 대담했던 저명한 일본 경제학자에게 유독 금융 분야가 뒤처진 이유를 묻자 그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실물경제의 주축인 제조업에 비해 금융 서비스업을 경시하는 사회적 인식과 상명하복(上命下服)의 경직된 문화가 원인이라는 말이다. 일본은 세계 3위 경제 대국 위상에 걸맞은 금융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고, 중국은 최근 주식시장에 대한 과도한 정부 개입으로 불거진 '금융공산주의' 논란에서 볼 수 있듯 취약한 금융 시스템이 경제 선진화의 큰 걸림돌이 되고 있다.

한국 금융은 또다시 동네북 신세다. 세계경제포럼(WEF)이 국내 금융시장 성숙도를 아프리카 수준으로 평가했다. 개혁 속도가 느리고 체감도가 떨어진다는 비판과 함께 대통령으로부터 경제부총리에 이르기까지 금융 개혁에 채찍을 더하고 있다. 세계 87위라는 평가의 타당성에 의문이 제기되기도 하지만 타당성 여부를 떠나 금융 후진국이란 오명을 씻도록 국력과 지혜를 모아야 한다.

이달 초 국제통화기금(IMF)은 우리 경제의 무기력증이 성장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경고를 보냈다. 중국의 경기 둔화로 대외 여건이 악화되는 가운데 내년을 정점으로 국내 생산 가능 인구의 감소세가 예상되면서 저성장의 고착화 우려도 깊어지고 있다. 빚으로 연명하는 3000여개 좀비 기업의 본격적 구조조정을 위해 금융계 체질 개선도 시급한 상황이다. 미국·영국 등 해외 사례가 보여주듯 건강한 금융은 경제 활성화와 역동성 회복의 지렛대다.

금융 개혁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과거에도 수차례 반복 추진되었다. 왜 개혁 드라이브가 종종 헛바퀴를 도는지, 선진 한국을 위한 금융 개혁의 성공 요건은 무엇인지 되짚어 보자.

먼저 금융에 대한 바른 인식과 철학이 필요하다. 금융의 기능은 진화하지만 본질은 크게 변하지 않는다. 흔히 금융은 경제의 '심장과 혈맥'으로 비유되는데, 심혈 기관이 신체의 '자율신경계'에 속한다는 사실은 의미 있다. 금융의 창조적 발전은 자율 경쟁의 생태계에서만 가능하다. 물론 자율성의 확대는 상응하는 높은 도덕성과 책임성을 요구한다. 금융은 대표적인 규제 산업인 만큼 소비자 보호, 시스템 안정, 시장 질서 유지를 위한 철저한 감독도 당연히 필요하다. 그러나 과도한 스트레스가 심근경색이나 동맥경화의 원인인 것처럼 외부 압박과 경영 간섭은 부작용을 키우고 자생력을 낮춘다.

정책 일관성과 규제 예측 가능성도 강화해야 한다. 과거 정부의 잘못은 고쳐야겠지만 좋은 개혁성과가 뒤집히면 곤란하다. 요즘 화두가 된 금융과 정보통신산업의 융합이라는 핀테크 시대를 맞아 재부각된 은산(銀産) 분리 문제가 일례다. 2008년 글로벌 금융 위기 와중에도 어렵게 이룬 은산 분리 규제 개선은 19대 국회 초반 경제 민주화의 정치적 유탄을 맞고 없던 일이 됐다. 긴 안목에서 바람직한 개혁 기조는 일관되게 유지되어야 한다. 규제의 회귀 본능을 감안할 때 '더 많은 규제'의 유혹을 떨치고 '더 나은 규제'를 지향하는 것은 정치 이념을 떠나 지켜야 할 원칙이다.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고 효율적 소통 채널도 확보해야 한다. 금융의 사회적 책임도 중요하지만 공공성을 무리하게 강조하면 상업성을 훼손하고 앞뒤가 상충되는 정책 주문은 시장 혼란을 야기한다. 산업은행 등 정책금융의 효율화, 슬림화는 민간 금융 발전을 위해 거스를 수 없는 대세다. 사공이 많고 다른 소리가 커지면 소관 부처의 추진력은 떨어진다. 금융정책과 감독을 총괄하는 금융위원회 리더십에 힘을 실어줘야 하는 이유다.

사회 인프라 전반의 혁신도 필요하다. 신체 각 부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듯 관련 분야의 혁신이 수반돼야 실효성 있는 금융 개혁이 가능하다. 정치와 노동 부분의 WEF 평가가 금융과 함께 바닥 수준이란 점은 사회 전반에 걸친 개혁 필요성을 일깨운다. 금융 회사의 경영 혁신도 필수다. 글로벌 역량을 갖춘 CEO와 전문 인력을 키우는 한편 아시아 지역 최하위로 뒤처진 우리 국민의 금융 지식수준도 획기적으로 높여야 한다. 자산 500조 국내 최대 기관투자자인 국민연금의 거버넌스 개혁은 자본시장 발전이나 금융 산업 경쟁력과 직결된 핵심 과제다. 최근 빚어진 내홍(內訌)을 조기 수습하고, 정치적 이해득실을 떠나 국가 미래를 위해 기금 운용의 '독립성, 전문성, 책임성' 강화라는 개혁은 차질 없이 실행에 옮겨져야 한다.

인도의 국부 마하트마 간디는 일찍이 '나라 망하는 7가지 조건'중 첫째로 '철학 없는 정치'를 꼽았다. 금융 개혁의 성공은 금융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철학을 공유하는 정치 문화에 달려 있고, 시장 질서와 자율의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는 생태계 조성이 관건이다. 정치와 정부의 개입 소지가 큰 금융 기업 지배구조의 특성상 더더욱 그렇다. 금융 선진화의 로드맵은 자명하다. 바른길 꾸준히 가는 것이 정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