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만남은 2001년 6월 이뤄졌다. 당시는 DJ 정권과 보수 언론이 '전쟁'을 벌일 때였다. 해외에 있던 나 역시 갑자기 불려 들어와 사회부장을 맡게 됐다. 국세청은 6월 20일 조선일보 등 6개 언론사를 탈세로 고발했다. 곧 검찰 수사와 사주 구속 등이 뒤따를 예정이었다. 바로 이날 청와대 정책수석을 맡고 있던 박씨가 시내 한정식 집으로 중앙 일간지 사회부장단을 초대했다. 곧 술판이 벌어졌다. 폭탄주가 돌고 농담이 오고 갔다. 박씨의 다소 호기 어린 모습에 슬그머니 부아가 치민 나는 13년 전 뉴욕 이야기를 꺼냈다.

"박 수석, 뉴욕서 전경환과 그렇게 친했다면서?"
그 말에 박지원은 그날 처음으로 굳어진 표정을 보여 주었다.
"아…, 뉴욕 한인회장을 하다 보면 의전상 다…."
그는 말을 더듬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자발적으로 매우 가까웠다고 하던데…. 전경환의 '가방모찌'(어떤 사람의 가방을 메고 따라다니며 시중을 드는 사람을 속되게 이르는 말) 노릇을 했다며?"
그는 당황한 표정이 역력했다. 나는 좀 거칠게 말을 했다. 어차피 권력과 언론 간의 갈등이 전면전으로 번진 판에 굳이 예의를 차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이날 이후 그는 내게 잘 대했다. 내가 전화를 걸면 즉각 받았고 어떤 사건에 대해 확인을 요청하면 적당히 이야기를 전해주곤 했다.

누구와도 손잡고 굽힐 줄 아는 인물

그는 여러 얼굴의 사나이다. 스스로 고백했듯 ‘좌익의 아들’이요, ‘성공한 재미교포 사업가’였고, ‘전경환의 오른팔’을 거쳐 ‘DJ의 충신’이 됐다. 그런 전력 때문에 그에 대한 비판과 칭찬 역시 극명하게 갈린다. 그는 세상에 굴신(屈身)할 줄 안다. 목적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모든 것을 굽히고 누구와도 손잡을 수 있는 인물 같다. 그를 보면 이방원과 정몽주의 고사(古事)가 떠오른다. 박지원의 이력을 돌아보면 그는 정몽주보다 이방원 편에 설 인물이다. 정치적 스승인 DJ가 정치인의 덕목으로 강조한 ‘서생적(書生的) 문제의식과 상인적(商人的) 현실감각’ 중 그는 철저히 후자 쪽이다.

그러나 바로 이 점에서 정치인 박지원의 존재 이유와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박지원은 DJ의 충신이 되기까지 평생 주변인(outsider)으로 맴돌았고 끊임없이 권력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후 자신의 연고인 호남 세력에 편입된 뒤에도 DJ 적손인 민주화 동지들로부터 그리 환영을 받지 못했다. 대통령 비서실장을 떠난 후 수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러나 DJ 사후 최고위원, 당 원내대표를 거치며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섰다.

이 나라 정치인의 삶을 몸으로 통렬히 체험한 그이기에 도리어 속 좁고 척박한 한국적 상황을 개선시킬 수 있지 않을까. 이념(理念)으로 포장된 이권(利權), 개혁(改革)으로 위장한 개악(改惡), 명분(名分)으로 치장한 명리(名利)와 더불어 혈연·학연·지연 등 온갖 연고(緣故)가 판치는 이 위선적 정치판에서 그는 자신의 정치적 욕망을 위해 좌우를 넘나들며 ‘솔직하게’ 살아온 인물이다.

2014년 봄 영·호남 출신의원 20여 명이 전남 하의도 DJ 생가와 경북 구미 박정희 생가를 차례로 방문하고 사진을 찍었을 때 박지원은 그 한가운데서 환하게 웃었다. 지역갈등 해소와 여야 화합을 다짐하는 모임을 주도한 그의 역할이야말로 그다운 행동이요, 참 보기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