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진 누이를 찾기 위해 여러 번 이산가족 찾기에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이렇게 가족이 함께 한국으로 왔습니다. 생사라도 알고 떠나고 싶어요."

6·25전쟁에 참전했던 필리핀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마놀로 빌라모어(61)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강원도에서 열리고 있는 전국체육대회(이하 전국체전)에 필리핀 대표팀 임원 자격으로 왔다. 그의 두 딸도 동행했고, 필리핀 청소년 대표팀인 아들 로렌조 빌라모어(22)는 이번 체전 해외동포부 테니스 복식경기에 출전해 은메달을 따냈다. 가족 모두 이번이 첫 한국행이다.

‘필리핀·한국 첫 공식 혼혈’로 6·25 참전 필리핀 군인의 아들인 마놀로 빌라모어(왼쪽서 둘째)씨가 전국체전 임원으로 한국에 와 헤어진 누나를 찾고 있다. 그의 양옆은 두 딸, 오른쪽은 테니스 은메달리스트인 아들이다. 오른쪽 사진은 50여 년 전에 딸을 찾아 홀로 한국에 가던 길에 세상을 뜬 어머니.

벌써 예순을 넘긴 빌라모어의 국적은 필리핀이다. 하지만 출생신고는 아버지가 주 필리핀 한국 공사관에 했다고 한다. "아버지로부터 들었는데, 당시 공사관에서 '이 아이는 공식적으로 신고된 첫 한국·필리핀 혼혈아'라고 했답니다. 별난 기록을 세운 셈이지요."

평창에서 만난 그는 "내 어머니 이름은 '묵명문'"이라며 어설픈 한국어로 몇 번 말하고는 빛바랜 흑백사진을 수십 장이나 꺼내 보였다. 군인이던 아버지 에네스트 빌라모어와 어머니는 1953년 정동제일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딸을 낳았다. 부모는 외가에 딸을 맡기고 다음 해 필리핀으로 가서 빌라모어씨를 낳았다. 비행기가 흔치 않던 시절, 부모는 딸이 어느 정도 크면 필리핀으로 데려올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1962년 딸을 만나러 혼자 한국에 가던 어머니가 여객선에서 심장마비로 숨지고 말았다. 그렇게 한국과의 인연은 완전히 끊기는가 싶었다.

그는 "어머니가 누나를 '묵조인'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며 흐릿한 기억을 꺼냈다. 빌라모어씨는 수십년간 멀리서 누나의 흔적을 찾았지만 한국에 묵씨 성을 가진 집이 많지 않다는 사실밖에 알 수 없었다고 한다. 그는 기자의 손을 잡으며 "경찰에도 물어봤는데 개인 정보여서 알려줄 수 없다는 답만 들었다. 묵씨가 사는 집집마다 전화를 돌릴 방법은 없겠나"하고 물었다. 통계청에 따르면 마지막 성씨 조사를 한 2000년 기준으로 전국의 묵씨 가구는 65가구에 179명뿐이다.

6·25 참전 군인인 그의 아버지는 35년 전인 1980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는 "내가 네 어머니와 사랑에 빠졌던 곳, 내가 지켰던 한국에 돌아가 네 누나를 보고 싶다"고 말하곤 했지만 결국 한국 땅을 다시 밟지는 못 했다. 빌라모어씨는 "아버지가 목숨 걸고 지킨 나라가 이렇게 발전한 모습을 본다면 얼마나 좋아하실까요"라며 눈물을 훔쳤다.

미국계 제약회사에서 일하다 최근 은퇴한 그는 "그동안은 사실 두려운 생각도 없지 않아 한국에 올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번에 용기를 내서 가족 모두 한국에 왔다"고 했다. 체전 은메달을 목에 건 로렌조는 "내가 메달을 땄으니 혹시 고모를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물었다. 전국체전에는 번외로 해외동포부 경기가 따로 있다. 이번 대회에는 17개국 1300여 명의 동포가 참가했다. 한국 국적이 아니라도 한국인의 피가 섞였으면 참가할 수 있다. 빌라모어씨는 인터뷰를 마치고 외가가 있던 서울 서대문구, 그리고 아버지·어머니의 결혼식이 열렸던 서울 정동제일교회를 찾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