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의 명물 반열에 오른 광화문 글판이 첫선을 보인 지 25년 됐다. 제법 세월의 더께가 쌓였다. 해외에 나가 10~20년을 산 동포가 서울 하면 떠올리는 표지로 광화문 글판이 첫손 꼽힌다. 글판은 석 달에 한 번 계절 갈이 하듯 교보생명 빌딩 외벽에 시구를 바꿔 거는데 추억을 되살리는 역할도 하는 모양이다. 교보생명이 '글판 25년'을 기념하는 뜻을 기려 옛 작품 예순아홉을 놓고 설문조사를 했다. 1위가 나태주 시인의 '풀꽃'이다.

▶글판에 전문(全文)을 새길 만큼 시가 짧다. 석 줄이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첫눈에 반하지 않으면 사랑도 아니라는 세태를 나무라듯 자세히 오래 들여다보라고 타이른다. 결구가 절창이다. 그렇게 사랑한 사람이 바로 너이고 또 나일 수 있다니 뭉클해진다. 한 설문 참가자는 몰래 회사에 사표를 내고 8년을 살다 버스 안에서 이 시를 보고 "가족을 생각하며 많이 울었다"고 했다.

▶글판을 만들어 벽에 거는 일은 교보생명이 맡지만 시구를 뽑는 일은 대산문화재단에서 한다. 문학 담당 기자 때 4년 선정위원을 맡으면서 사뭇 떨리는 기쁨을 맛본 게 한두 번이 아니다. 문인과 재단 관계자 일곱 위원이 수십 편 후보작을 놓고 토론도 벌이고 투표도 한다. 마지막 후보작을 줄여 가느라 투표를 세 번씩 했다. 글판 크기나 시절 분위기와 조금 안 맞을 경우엔 시인 허락을 받아 몇 자 고치기도 한다. 그렇게 뽑은 글판을 사람들이 감탄하며 올려다볼 때 흐뭇했다.

▶설문조사에서 2위는 정현종의 '방문객', 3위가 장석주의 '대추 한 알'이다. 그러나 순위는 쓸데없다. 누구에게나 제 마음을 울리는 시는 따로 있다. 어떤 고위 공직자는 광화문 글판에서 고은의 '낯선 곳'을 읽었다. '떠나라 낯선 곳으로/ 그대 하루하루의/ 낡은 반복으로부터.' 감동을 받은 이 사람은 곧바로 공무원을 그만두고 평소 꿈꾸던 사업을 시작했다. 이렇듯 글판은 갓 제대한 청년을, 큰 실패를 겪고 실의에 빠진 가장을 오늘도 안아준다.

▶광화문에는 하루 오가는 사람이 100만 명, 차가 25만 대쯤 된다. 열에 한 명만 글판을 봐도 10만 명이다. 환경재단이 '세상을 밝게 만든 100인'을 선정하면서 처음으로 사람 아닌 이 글판을 뽑은 게 2007년이다. 외국 문인들도 부러워하는 문화 상징물이다. 근래 다른 공기관과 기업 건물도 시를 내거는 일이 많다. 화장실 안쪽에, 지하철 문에, 동네 아파트나 초등학교 담벼락에도 시가 붙어 있다. 광화문 글판이 그 씨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