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총리만 바뀌면 일본이 전쟁 책임을 인정하고, 동아시아 이웃들과 평화롭게 공존하는 역사 인식을 갖게 될까요? '정치 권력(political regime)'이 아니라 '기억의 정권(memory regime)'이 바뀌는 게 더 절실한 문제 아닌가요?"
서양사학자 임지현(56) 서강대 교수는 요즘 자신을 소개할 때마다 역사학자 대신 '기억의 운동가(memory activist)'라는 표현을 쓴다. 민족과 국가를 앞세우며 이웃 나라와 충돌을 빚는 자국사(自國史) 중심의 한계를 벗어나 지구적 차원에서 역사 또는 기억을 보편화시켜 보자는 취지다. 최근 몇 년간 집요하게 추적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도 국사(國史) 패러다임을 벗어나야 역사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예컨대, 유태인들이 나치 대학살의 희생자라는 사실을 내세우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억압을 정당화하거나, 2차 대전 당시 폴란드가 나치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유태인 학살을 도운 가해자로서의 책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비판한 것이다.
"일본 지식인들은 좌파와 우파를 막론하고 히로시마나 나가사키 원폭 투하 때 수많은 인명이 희생된 것을 빌미 삼아 일본을 희생자로 여기는 생각이 강합니다. 비뚤어진 희생자의식이 작동한 거지요."
임 교수는 10여 년 전 계간지 '당대비평' 편집위원을 맡아 '일상적 파시즘'과 '대중독재'라는 개념을 통해 한국 사회를 비판해 지식인 사회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파시즘이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깊숙이 침투해있고, 파시즘에 반대하는 사회운동 진영까지 파시즘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날카로운 분석은 '운동권'까지 들끓게 했다.
최근 몇 년간 '국가 경계를 넘어선 역사(Transnational History)'를 연구해온 임 교수는 미국과 영국, 독일, 폴란드 등에서 논문과 단행본을 출간하는 등 해외 학계에서 활약해왔다.
임 교수는 지난 8월 중국 산둥성 지난(濟南)에서 열린 '지구와 세계사 연구 네트워크(Network of Global and World Histroy Organizations·NOGWHISTO)' 총회에서 임기 5년의 신임 회장에 선출됐다. 북미(北美)의 '세계사 학회(World History Association·WHA)'와 유럽의 '보편사와 세계사를 위한 유럽 네트워크' '세계사 아시아 학회' 등 하부 조직을 둔 NOGWHISTO는 라이프치히에 본부를 두고 '국가 경계를 넘어선 역사' 연구를 추구하는 국제학술단체다. 임 교수는 "한·중·일 간에 첨예하게 대립하는 동아시아 역사 문제를 논의하는 기회도 만들어보고 싶다"고 했다.
지난 1학기 한양대서 서강대로 자리를 옮긴 임 교수는 얼마 전 대학 내에 트랜스내셔널 인문학연구소를 설립했다. 내년 8월 베를린의 나치범죄 자료센터와 함께 나치 점령기와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을 비교하는 워크숍을 베를린에서 열고, 이듬해엔 서울에서 번갈아 여는 식으로 비교연구를 해나갈 예정이다. 임 교수는 "강제징용이나 일본군위안부 문제는 한·일 간 민족적 갈등의 차원을 넘어서 반(反)인도적 인권침해라는 보편의 문제로 접근하는 게 세계인들의 공감을 얻기 쉬울 것"이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