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대미(對美) 공공외교를 책임지는 사사카와(笹川) 평화재단의 데니스 블레어 이사장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지난 8월 전후(戰後) 70년 담화를 “책임 회피로 일관한 실망스러운 문서”라고 강력히 비판했다. 미 국가정보국장 출신으로 대표적인 ‘친일파’로 꼽히는 블레어 이사장은 아베 총리가 담화를 발표한 당일 작성한 논평을 최근 사사카와 재단 홈페이지에 전격적으로 올렸다.
사사카와 재단은 A급 전범 용의자 출신인 사사카와 료이치(笹川良一)가 설립한 워싱턴 정가의 핵심 싱크탱크로, 일본 관련 세미나와 콘퍼런스를 직접 주관하거나 후원한다. 지난 4월 말 아베 총리 방미(訪美) 때도 워싱턴 DC의 최고급 호텔에서 일본과 가까운 미국 내 여론주도층 400명을 모아놓고 특별강연회를 단독으로 열어 ‘친일 여론’ 형성에 앞장섰다.
블레어 이사장은 논평에서 “아베 총리가 ‘우리는 역사의 교훈으로부터 미래를 위한 지혜를 얻어야 한다’ ‘무고한 사람에게 우리나라가 헤아릴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끼쳤다’고 말했지만, 20년 전 무라야마 담화에 크게 못 미쳤다”며 “일본이 과거사를 정면으로 직시하고, 타국에 일본이 그렇게 했다는 점을 인정하는 데는 턱없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그는 “짧은 무라야마 담화는 일본의 잘못된 정책을 인정하고 반성과 사죄를 표현하는 강력한 문장들로 이뤄진 게 특징”이라며 “반면 장황하고 두서없는 아베 담화는 너무 많은 주제를 다뤄 메시지를 분산하려는 변론문에 가깝다”고도 말했다. 무라야마 담화에 ‘일본은 잘못된 정책을 따랐다’ ‘일본은 많은 고통을 초래했다’는 표현이 있고, ‘나는 통절한 사죄를 밝힌다’고 하는 등 주체를 분명히 한 데 비해 아베 담화는 익명의 수동적 목소리만 담아 책임을 회피했다는 게 블레어 이사장의 생각이다.
블레어 이사장은 “아베 담화는 실망스러우며, 아베 총리에 대한 지지자를 교육하고, 다른 나라를 안심시킬 큰 기회를 놓쳤다”며 “우리는 일본의 지도자들이 일본인이 자국의 과거를 더 잘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블레어 이사장은 올해 초 한 세미나에서 일본의 과거 악행을 언급하면서 동시에 “한국도 베트남전 때 무자비한 행동을 많이 했다”고 주장해 논란을 일으켰다. 이 때문에 일본의 이익을 대변하는 재단의 최고책임자가 일본 총리를 직설적으로 비판한 글을 홈페이지에 올린 배경을 놓고 워싱턴 외교가에서는 다양한 분석이 나오고 있다. 일부는 재단 측이 이사장을 교체하려는 상황에서 블레어 이사장이 선수를 친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