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복 요리사의 중식당 목란을 방문했다. 오후 3시부터 시작되는 브레이크타임. 말이 브레이크타임이지 주방은 평소보다 더 바빠 보인다. 게다가 이 시간은 그날 주문받은 만두를 '싸는' 시간이다. 그는 군만두도 손으로 직접 싼다. 이연복을 비롯한 화교 요리사들은 만두를 빚는다고 하지 않고 '싼다'고 표현한다.

"이 시간에는 만두를 싸요. 옛날에는 보통 8백~9백 개 쌌어요. 지금은 한 4백 개? 나눠 싸기도 하고요."

두 다리로는 이렇게 쉽게 올 수 있지만, 사실 목란은 전화로 연결되기가 여간 어려운 곳이 아니다. 수백 통 걸어 겨우 두 달 뒤 예약을 잡았다는 사람이 부지기수. 기자 역시 유사한 방법으로 겨우 예약을 잡았다고 했더니 얼굴에 미안함이 가득하다.

"예약하려고 전화를 걸어도 통화가 잘 안되니까 어떤 손님들은 엄청 짜증내죠. 오자마자 휴대전화 들이대면서 왜 전화 안 받아! 왜 전화 안 받느냐고! 하면서 삿대질하는 손님도 있어요. 오늘처럼 이연복은 거의 매일 주방을 지킨다. 방송은 대부분 휴무일인 월요일에 잡는 편. 바쁘니까 자리를 비우는 일이 많을 줄 알았는데 그 반대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와서 깜짝 놀라요. 어? 매장에 있네? 하고요."(웃음)

◆ 책가방 대신 배달통 들던 꼬마 요리사

알려졌다시피 그는 화교 출신 요리사다. 그가 자라던 시절, 화교는 거의 예외 없이 중식당 요리사가 되곤 했다. 이연복도 그 길을 걸었다. 다만 그 시기가 남들보다 좀 빨랐다. 열세 살에 책가방 대신 나무 배달통을 손에 든 그가 동네 가게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중식당, 호화대반점을 거쳐 주한 대만 대사관에 최연소 주방장으로 입성하기까지,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불같은 성격의' 반항아 기질은 10년의 일본 생활 끝에 둥그스름해졌고, 서울에서만 네 군데를 옮겨가며 지금의 연희동 목란을 운영하고 있다. 지면이 턱없이 모자라 아쉬움만 커진 그의 45년 요리 생활, 그 일부분 옮긴다.

중식당 주방에서는 셰프라고 안 부르고 사부라고 한다면서요. 화교들끼리 있을 때는 '쓰부'(사부)라고 하거든요. 저 같은 경우는 성이 이 씨니까 '이쓰부', 성이 장 씨면 '장쓰부'라고 불러요. 근데 지금은 (중식당을 운영하는) 한국인이 많아지면서 셰프라고 하죠. 저 같은 경우는 오너셰프다 보니 사장님 소리를 더 많이 들어요.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중식당 배달 일을 시작했어요. 또래는 다 뛰어놀 나이에 사서 고생을 했죠.

그때는 학교 가는 게 지옥 같으니까 차라리 그 길이 낫겠다고 생각했어요. 화교소학교를 다니다 보니 학비가 되게 비쌌어요. 6학년쯤 되니까 동생들도 하나둘 학교에 가야 하잖아요. 부모님 부담이 컸겠죠. 그리고 제 날짜에 등록금을 못 내니까 학교에서 망신을 주는 경우도 많았어요. 등록금 못 낸 사람은 일어나서 수업들으라 그러고, 며칠이 지나도 못 내면 칠판 옆에 서서 수업받고. 나이도 어린데 자꾸 그런 식으로 불려 나가니까 학교가 정말 싫어지기 시작한 거죠. 학교가 남산이랑 가까웠거든요. 학교 안 가고 남산에 올라갔다가 학교 끝날 시간에 집에 가고 그랬어요.

어릴 때 일을 시작해서 '최연소 주방장', '최연소 대만대사관 주방장' 같은 타이틀이 많이 붙었어요. 그게 자부심이 되기도 했겠지만 부담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주한 대만대사관에 주방장으로 스물두 살에 들어갔는데, 그전까지는 일자리를 찾으려면 애로사항이 많았어요. 사실 스물한두 살이면 밑에서부터 일을 배우며 올라올 시기인데, 저는 적어도 부주방장이나 칼판 자리를 찾았으니까요. '나이도 어린 게 뭐야?'라는 식으로 시켜보지도 않고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죠.

대만대사관 주방장 시절에 요리를 응용하는 법도 많이 배웠다면서요. 고급 식재료를 접할 기회도 많았고요. 거기서 배운 요리들을 지금 많이 활용해요. 근데 초창기에는 그런 요리를 내놓으면 인기가 없었어요. 사람들이 그 음식을 모르니까 이게 뭐야? 하는 반응이었죠.

너무 앞서갔던 거네요. 평상시에 본 적 없는 요리를 내놓으니까 좀 어색했나봐요. 예를 들어 지금은 중국집에 자차이(짜사이)가 많이 나오잖아요. 제가 그 자차이를 되게 일찍 했어요. 근데 그땐 사람들이 그걸 몰랐어요. 이건 뭐지? 오이무침인가? 하면서 거의 잘 안 드시더라고요. 근데 지금은 잘 먹잖아요.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차이가 있는 것 같아요.

샥스핀은 쓰지 않는다고 들었어요. 목란 메뉴판에도 없죠. 저 같은 경우는 동물보호단체 같은 데서 협조 좀 해달라고 해서 안 쓰기 시작했어요. 아무래도 인지도 있는 사람이 협조를 해주면 더 도움이 된다고 하기에. 저도 동물 되게 좋아하거든요. 일본에서 상어 잡는 거 보면 한쪽에 몰아놓고 작살로 찍어서 죽이고 그래요. 그런 동영상 보니까 안 되겠다 싶더라고요.

대만대사관을 그만두고 일본으로 떠났어요. 특별한 계기가 있나요? 대사관에서 8년 일했어요. 대사관에 오는 분들은 대부분 귀빈이에요. 귀빈들이 오면 요리가 6가지, 그다음 식사와 디저트가 나와요. 근데 메인요리 6가지가 매일 바뀌어야 돼요. 왜냐면 손님들은 매번 다르지만 대사관과 대사관 부인은 항상 그 자리에 있으니까요. 내가 똑같은 요리를 하면 대사관과 대사관 부인은 매일 똑같은 요리를 먹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매번 요리를 바꾸어야 하는데, 그게 엄청난 스트레스였어요. 지금은 요리 책자도 많고 인터넷 검색하면 이것저것 나오잖아요. 그때만 해도 그런 게 없었으니까요. 그렇게 8년을 하니까 힘들더라고요.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좀 정리를 해야겠다, 하던 차에 일본에 가겠다는 결정을 내렸어요. 마침 일본에 있는 지인이 "너 정도면 지금 버는 돈의 10배는 번다"며 용기를 주기도 했고요. 

그전까지 '성질 불같고 주먹 잘 쓰는 이연복'이 일본 생활을 하고 난 뒤 많이 바뀌었다고 했어요. 대사관에 근무할 때 한 대사관이 "자네는 눈이 너무 날카롭다. 아침에 거울 보면서 웃는 연습을 해보는 건 어떻겠느냐" 하더라고요. 연습하긴 했는데 그게 참 어색했죠. 그래도 꾸준히 하니까 약간은 바뀌더라고요. 근데 완전히 바뀐 건 일본에서였어요. 일본 사람들은 건성이든 진심이든 음식을 먹으면 무조건 오이시!(맛있어요), 나갈 땐 아리가토 고자이마시다!(고마웠어요) 하고 사람 안 보일 때까지 인사를 해요. 그럼 우리도 같이 하게 돼요. 그걸 오랜 시간 하다 보니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더라고요. 그러면서 표정도 바뀌고 마음가짐도 바뀌기 시작했어요.

방송에서 후각을 잃었다고 언급한 적이 있어요. 근데 그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밖에 몰랐던 사실이라면서요. 요리사가 냄새 못 맡는다고 하면 어느 정도 타격은 있어요. 그래서 알리고 다니진 않았는데 어느 잡지사에서 촬영하다가 향이 어때요? 이런 이야기가 나왔어요. 지나가는 말로 "나는 냄새를 못 맡는다"라고 했는데 그 뒤로 인터넷에 기사가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러느니 내가 터뜨려야 되겠다 해서 방송에서 얘기한 거죠.

후각은 잃었지만 다른 감각이 예민해졌을 것 같아요. 미각이 발달되더라고요. 스스로 관리하는 것도 필요해요. 남들처럼 담배 피우고 술 맘대로 마시면 안 되죠. 그래서 아침은 안 먹고 저녁에 폭음도 안 해요. 담배 끊은 지는 13~14년 됐고요.

냄새를 대신 맡아주는 조수를 두나요? 같이 일하는 직원들한테 종종 물어봐요. 근데 그것도 가장 믿는 사람이 우리 와이프죠. 와이프는 냄새에 되게 민감해요. 애들한테 물었는데도 긴가민가할 때는 와이프한테 맡아보라고 해요.

요리사님 요리에 직언을 해주는 사람도 부인이겠죠? 그럼요. 음식을 만들면서 가장 가까이에 있는 파트너가 와이프죠. 이건 이렇게 하면 어때? 하는 제안도 많이 해요. 사실 중식은 옛날에 사부가 가르친 틀 그대로 가요. 만약 간장을 식초라 그러면 그건 식초인 거예요. 근데 저는 젊었을 때부터 약간 반항기가 있어서 그런 걸 싫어했어요. 여기에 뭘 좀 더 넣으면 훨씬 맛있는데 굳이 정석대로 가야 되나, 하는 생각. 그래서 난 남들 하는 요리가 아무리 맛있어도 내 요리에는 약간이라도 차별화를 두자고 옛날부터 생각했어요.

◆ 직업 숨기고 만난 아내, 동거에서 결혼까지

요즘이야 유행처럼 요리사, 그러니까 '셰프'가 남편 직업으로 인기다. 그런데 40년 전만 해도 상상도 못할 일이었단다. 이연복 역시 직업을 숨긴 채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나중에야 요리사라는 걸 밝혔는데 아내는 놀라는 표정 대신 "그게 뭐 어때서?"라고 되물었다고. 유복한 가정에서 부족함 없이 자란 아내는 선을 보라는 부모를 피해 이연복의 본가로 '피신'했다. 그렇게 시부모와의  동거가 시작됐고 둘은 자연스레 부부가 됐다. 결혼식을 치른 건 그로부터 10년 뒤. 이연복 요리사의 책 에는 아내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이 특히 더 담겨 있다.

두 분이 어떻게 만나셨어요? 우리 와이프는 형수의 친구예요. 형수가 형이랑 데이트할 때 둘이 있으면 어색하니까 와이프를 데리고 나온 거예요. 형은 여자 둘이랑 다니는 게 좀 그러니까 자기 친구를 데려와서 와이프한테 소개시켜줬죠. 근데 우리 와이프는 그 친구가 맘에 안 든 거예요. 어쩌다 보니 같이 어울려 놀던 저와 정이 든 거죠.

처음엔 요리사라는 직업을 밝히지 않았다면서요. 우리 때는 요리사라는 직업이 되게 창피했어요. 그땐 공장 다니는 사람에게는 공돌이·공순이라 그러고, 식당 다니는 사람에게는 식돌이·식순이라 그랬어요. 나이트클럽에 가면 고고타임 한 번, 블루스타임 한 번 번갈아가며 있는데, 블루스타임 때 여자들하고 춤을 추면 (몸에 밴 음식) 냄새가 나잖아요. 그래서 파스를 몇 장씩 붙이고 가요. 여자들이 왜 이렇게 파스 냄새가 심해? 물으면 팔이 좀 결려서, 허리를 다쳐서 그런 식으로 핑계를 댄 거죠.

나중에 요리사라는 직업을 알고 부인의 반응이 어땠나요? 아내는 의외로 개의치 않아 하더라고요. 흔쾌히 받아들였지만 집안(처가)에서는 싫어했죠. 집에서 자꾸 선을 보라고 하니까 집을 나왔고, 어쩌다 보니 저희 집에 머물며 동거 아닌 동거를 하게 됐어요. 신혼집도 아닌 본가에서 동거를 시작한 거죠. 그 후 10년이 지나고 나서야 결혼식을 올렸어요.

책에서 부인에 대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많이 표현하던데요. 식당 일을 계속 같이 했어요. 여자가 하기에 너무 벅찬 일도 마다않고 해왔거든요. 그러니까 미안함이 있죠. 일본에 있을 때도 주방장이 하도 속을 썩이다 보니 '에이, 차라리 내가 배우고 만다' 해서 그때부터 요리도 배우기 시작했고요. 그래서 지금은 되게 잘해요.

자녀가 둘인데 그중 요리를 하겠다는 자녀는 없었나요? 제가 처음부터 시키려고 하질 않았어요. 절대 요리하면 안 된다, 무조건 공부를 많이 하라고 했죠. 정말 힘드니까요. 지금도 아마 많은 요리사가 자식이 요리 배운다고 하면 반대할 거예요. 자기 자식한테 이 길을 걷게 하고 싶진 않을 거예요. 한식, 양식은 다를지 모르겠어요. 근데 중식은 진짜 힘드니까요.

어떤 점이 중식 요리사로서 가장 힘들었어요? 우선 내 시간이 없다는 거죠. 아침 9시에 출근해서 밤 11시에 끝나니까 자기 생활이 없어요. 젊은 애들은 하다가 포기하는 경우가 많아요. 지금도 말이 브레이크타임이지 주방에서 계속 준비해야 돼요. 그러니까 힘들죠. 근데 이런 걸 어느 부모가 자기 자식한테 시키려고 하겠어요.

요리사는 집에서 요리 잘 안 한다던데, 실제로는 어떠세요? 요리보단 주로 외식을 해요. 외식할 땐 거의 와이프 위주로 먹어요. 나는 혐오식품 빼고는 다 잘 먹고요. 와이프는 한식 종류를 좋아해요. 외국 여행 가면 한식집 찾아다니느라 애먹죠. 새로운 요리에 도전하는 편은 아니거든요.

두 분이 여행은 자주 하세요? 식당을 접고 새 식당을 오픈하기 전까지 남는 시간에는 주로 여행을 가요. 근데 와이프하고 저는 비행기를 오래 못 타요. 오래 타면 뭔가 조바심나고 되게 불편해요. VIP석(비즈니스클래스)이라 그러나? 그걸 한 번도 못 타봤어요. 이름이 좀 알려졌다고 모양 내고 선글라스 쓰고 이런 거 진짜 싫어해요. 항상 내가 있는 자리를 고맙게 생각하고 이 자리를 지켜야겠다는 생각이지, 잘나간다고 일도 안 하고 폼이나 잡는 거 진짜 싫어하거든요. 그래서 비행기 탈 때도 항상 이코노미석에 앉아요.  

그럼 먼 나라는 거의 안 가겠네요? 최고로 멀리 간 게 코타키나발루(말레이시아)예요.
미국이나 유럽으론 안 가보셨어요? 한 번도 못 가봤어요.

가고 싶은 생각이 없는 건가요? 아유, 있죠. 만약에 미국에 간다면 그때는 호들갑이 아니라 한번 편하게 (비즈니스석을 타고) 가보고 싶긴 해요.

비즈니스석 정도는 타셔도 돼요. 그건 누구도 호들갑이라고 안 합니다. (웃음) 내가 그런 생활을 즐기다 보면 어느 순간 그런 데 빠져서 건방 떨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지 않아요.

어린 나이에 고생하면서 이 일을 시작했기 때문에 이제는 자신을 위한 보상이 필요한 시기인 것 같아요. 특히 옆에서 함께 고생한 부인도 그렇고요. 아내가 지금도 앞에서 고생은 많이 하는데, (아내는 목란의 프런트를 담당한다.) 그래도 해달라는 건 다 해줘요. 주위 사람들이 행복해야 저도 행복하다는 걸 아니까 될 수 있으면 주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려고 하죠.

◆예능감, 실력 둘 다 잡은 '셰프테이너'

TV만 틀면 셰프가 나오고, 심지어 그 셰프들이 재미있기까지 하다. 요즘 이렇게 요리도 하면서 예능감도 두드러진 엔터테이너를 가리키는 신조어가 생겼다. 바로 셰프테이너다. 이연복도 그 중 한 명이다.

얼마 전 에서 가수 지드래곤 냉장고에 있는 식재료로 '갈삼만두'(갈치 살을 넣은 만두)를 만들어서 우승했어요. 근데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였는지 만들어놓고 아쉬운 표정이 역력하더라고요. 갈치가 잘 안 익었거든요. 빨리 익히고 다른 갈치도 익혀야 되는데 그러질 못했어요. 해동이 덜 돼서 안에 있는 살은 뜯어지질 않더라고요. 그 점이 되게 아쉬웠어요. 그리고 15분 만에 만두 반죽해서 떼내 밀고 소 만들어서 싸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서 사실 할까 말까 굉장히 고민했어요. 근데 상대가 센 사람이 나오면 저도 세게 나가거든요. (센) 홍석천이 나오니까 되든 안 되든 하자, 해서 한 거예요. 

지드래곤 냉장고에 고급 식재료가 많았는데 소박한 것들을 골라서 의외였어요. 사실 중식에서는 캐비아니 송로버섯이니 하는 걸 안 써요. 솔직히 얘기해서 제가 그것들을 쓸 줄 몰라요. 그런 재료를 접한 지가 그리 오래되지 않았어요. 게다가 어떤 향인지도 모르는데 쓸 수는 없죠. 

방송을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중국인 요리사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싶어서라고 얘기한 적이 있어요. 중식 요리사는 이상하게 한식 요리사나 이탈리안 같은 양식 요리사보다 방송에 안 나오더라고요. 중식은 일반 가정에서 해먹기 힘들다는 고정관념 때문에 PD나 작가들도 굳이 중식 요리사를 부를 필요가 없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 같아요. 그래서 저는 방송에서 빠르고 간단한, 가정에서도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걸 해요. 중식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일종의 사명감도 있고요.

근데 방송 체질인 것 같아요. 박명수 씨랑 티격태격할 때도 그렇고 솔직한 성격 같다고 할까. 평소에 스트레스를 안 받으려고 노력해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그 원인을 제공한 상대방에게 직접적으로 얘기를 해요. 방송에서도 촬영하다 마음에 안 들거나 거짓으로 연출을 시키면 이건 아니다, 확실히 짚고 넘어가요. 그래서 촬영할 때도 이경규 씨가 너무 오버를 하기에 "경규 씨, 내가 경규 씨보다 나이 많은 거 알고 시작합시다"라고 말했는데 그게 방송에 나갔더라고요.(웃음)

집에서는 방송하는 것에 대한 반대는 없어요? 반대는 없는데 가장 힘든 건 주위 사람들이 저한테 투정 부리고 짜증낼 때예요. 제가 방송 촬영하느라 잠깐 자리를 비우면 와이프도 투정 부리고 일하는 사람들도 투정 부리고. 저 역시 몸도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힘든데, 그걸 응원해주는 사람은 없어요. 가끔 돌아보면 '아, 외롭다. 나는 힘들어도 누구한테 투정 부릴 사람도 없구나' 싶죠.

혹시 아직 못해본 일, 또는 추후 목표나 계획이 있나요? 식당업을 이거(목란)보다 작게 카페처럼 예쁘게 만들어서 세미 목란식으로 해보고 싶어요. 지금처럼 복잡하게 안 하고 자장면·짬뽕·탕수육·만두 같은 대중적인 메뉴 8~10가지만 가지고요. 이건 지금 뭔가 잘못됐어요. 맥주를 적당히 따라야 되는데 잘못 따라서 넘친 느낌. 오버가 돼버렸어요. 사람들한테 욕 얻어먹기 딱 좋은 가게예요. 예약조차 못하니까 악플도 달리고요. 뭐, 그런 거야 신경 안 쓰는데, 많은 사람이 좋아하고 다가올 수 있는 매장을 만들어야 될 것 같아요. 어느 정도 좇아오는 제자들을 군데군데 심어서 조그맣게 가게들을 하고 싶어요.

요리사 이연복은…
이연복은 1959년 서울 왕십리의 한 화교 집안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명동의 화교소학교를 다녔지만 가난에 못 이겨 6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중식당 요리사의 길로 접어든다. 동네 중식당을 전전하며 배달부터 시작한 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 중식당인 사보이 호텔의 '호화대반점', 주한 대만대사관 '최연소 주방장', 일본에서의 주방장 및 오너셰프 생활 10년을 거쳐 현재는 서울 연희동에서 중식당 목란을 운영하고 있다. 셰프의 방송 출연이 대세인 요즘, 예능 프로그램 , , 등에 출연하고 있다. 최근에는 자신의 요리 인생을 담은 에세이 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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