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이 날개라는 말을 한국의 속담이 아니라 현실 세계 속에 만들어낸 마술사 이영희. 그녀로 인해 우리는 옷이 아니라 문화를 입는다."(이어령 전 문화부장관)

여기, 한복 외길 40년을 걸어온 여인이 있다.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79). 1994년 한국 디자이너로는 최초로 파리 프레타포르테(기성복) 쇼에 올라 저고리 없는 한복 치마를 선보였고,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의 패션전문기자 로랑스 베나임은 그 옷에 '바람의 옷'이란 별칭을 붙여줬다. 전통을 뒤집은 과감한 디자인이었지만 외국인들 눈엔 한복의 고운 선이 우아하게 날아오르는 최고의 디자인이었다. 2010년 역시 한국에선 처음으로 세계 최고의 무대라 불리는 파리 오트쿠튀르(맞춤복) 쇼에서 한복을 소재로 한 컬렉션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1994년 프레타포르테 쇼에서 저고리 고름을 떼낸 ‘바람의 옷’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그가 23일부터 서울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이영희 전(展)―바람, 바램'을 연다. 2010·2012년 오트쿠튀르에 올린 바람의 옷과 전통 염색에서 발견한 회색·쪽빛·먹자줏빛으로 만든 한복 드레스들, 디자이너로서 꾸준히 수집해온 조각보와 비녀·족두리·버선·꽃신 등 전통 유물을 함께 공개한다. 미디어 아티스트 박제성은 그의 의상에서 영감을 얻은 현대 미술 작품을 전시한다.

16일 서울 신사동 작업실에서 만난 이영희는 임박한 전시에 손댈 게 많아 분주해 보였다. "힘들어 죽겠어요. 하지만 기왕 하는 거 잘하고 싶어서." 경상도 억양 짙게 밴 말투에 뿌듯한 미소가 배어나왔다. "조각보를 엮어 만든 이 치마 좀 보세요. 실크와 한산모시를 섞어서 엉글엉글하게 짠 이 천은 아래에 다른 천을 가져다 대면 속의 연꽃 무늬가 은은히 비쳐요. 아! 이건 연푸른 모시에 파도 모양을 묵으로 색칠한 치마인데 진짜 바닷빛처럼 멋스럽지요." 그는 "한복의 생명은 단아함"이라며 "그 뿌리는 전통 한복에 있다. 원전(原典)도 철학도 없이 신식으로만 해놓으면 삐뜩한 것이 하나도 안 괜찮아 보인다"고 했다.

이영희가 40주년 전시를 위해 만든 겨자색 한복 드레스.

[한복 외길 40년… 이영희 한복 디자이너]

그는 "최근 들어 한복을 맞춰 입는 사람이 드물고 중국산을 잠깐씩 대여해 입는다"며 안타까워했다. "값싼 중국 옷감으로 값싼 중국 바느질꾼의 손을 빌려 한복을 지어 와요. 기가 막히죠. 이러다 한복이 없어질 것 같아." 프랑스 명품 브랜드 샤넬이 지난 5월 서울에서 한복을 주제로 연 패션쇼를 보고는 "화가 나서 펄펄 뛰었다"고 했다. "맥락이 없잖아요. 정수리 위에 뚝 얹어놓은 트레머리는 옷과 조화가 안 맞고, 색동은 옆으로 길게 내려붙여서 그걸 색동이라 할 수 있는지 모르겠더라고. 깊이를 모르는 거예요."

그는 "우리도 일본처럼 어릴 때부터 한복 입는 교육을 시켜야 한다"며 "걔들은 서너 살 때 기모노 입고 절하는 법을 배운다"고 했다. 전통 옷으로 패션쇼를 여는 나라는 우리나라가 거의 유일하다. 변형과 응용이 가능해서다. "기모노는 하나밖에 없어요. 한복 연구가인 석주선 박사님이 그러는데 한복은 속바지·두루마기·쾌자 등 종류가 100가지도 넘는대요." 그러면서 그는 "이제는 개량한복처럼 편한 옷, 싼 옷만으론 안 된다"고 했다. "해외 나가보면 사람들이 남자 두루마기를 멋있다며 참 좋아해요. 옛것을 모던하게 만들되 중국 사람, 미국 사람, 아랍 사람 다 좋아할 수 있게 만드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는 얘기죠."

이순자·김옥숙·손명순·김윤옥 여사 등 대통령 부인들에게 한복을 지어줬지만 박근혜 대통령은 그의 한복을 입은 적이 없다. "다 인연이 있어야 해요. 인연이 없으면 못 합니다."

"한복으로 번 돈, 한복에 모두 되돌려주고 떠나는 게 꿈"이라 했다. "전성기 때 한복 팔아 번 돈은 파리에서 쇼 하느라 몽땅 다 쓰고, 이젠 수중에 돈이 없어 내 맘대로 팍팍 쓰지도 못하지만 한복에 드는 돈은 진짜 안 아까워요. 하고 싶은 것 맘껏 하고 살았으니 웃음 나고 행복해요."

외손부인 배우 전지현과 자주 만나냐고 묻자 "나도 바빠, 걔는 더 바빠"라고 했다. "근데 우리 손자랑 결혼하고 나서 더 잘 풀려서 참 다행이지 뭐야." '한복 대모'의 얼굴에 함박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