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계와 영화계 원로 몇 분이 모인 식사 자리에 함께하게 되었다. 그분들 얼굴에서 훈장처럼 빛나는 주름살을 실컷 보고 가리라는 생각으로 자리에 앉았다. 나는 사람의 주름을 대단히 사랑하는데 그 주름 속에는 온갖 이야기들, 삶의 기억들이 마디마디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건강과 근황을 묻고 답하는 사이, 고대 원로원 모임이 연상될 정도로 그곳에는 격조가 흘러넘쳤다. 그런데 식사가 시작되고 그분들이 기억 속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내기 시작하자 전혀 다른 공기로 전환되었다. 얼굴이 붉어지고 손놀림이 활달해지고 목소리도 눈에 띄게 커지고 리드미컬해져서 이분들이 칠순 팔순을 넘기신 분들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나는 그분들의 기억을 따라 60년대 영화 촬영장에 갔다가 70년대 연극 무대를 구경하고, 어느 지방 공연 뒤풀이까지 따라가서 술 한잔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억이라는 걸 자세히 들어보니 무난하고 편안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공연을 앞두고 누군가 도망가고, 급작스러운 사고로 배역이 교체되고, 기가 막힐 정도로 열악한 상황에서 기가 막힐 정도로 훌륭하게 공연을 했는데 돈 한 푼 받지 못했던 기가 막힌 일, 대사를 가지고 장난치는 배우를 공연 중에 다른 배우들이 골탕먹인 일…. 열악한 환경에서 고군분투했던 그 숨 가빴던 날들이 기억이라는 필터를 거쳐 이 어르신들을 몇십 년 전으로 되돌려놓고 있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기억이 공유되는 순간이었다. 순간적으로 감정의 폭발이 일어나면서 껄껄, 호호, 킥킥, 웃음소리와 호흡이 섞인 감탄사들이 동반됐다. 얼굴마다 비슷한 주름들이 잡히면서 보고 듣기만 하던 나조차도 어느새 같이 상상하고 호흡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드라마에서 왜 그토록 자주 주인공들이 기억상실증에 걸리는지 알 것 같다. 인간에게서 기억을 제거해버리면 그는 이미 그가 아니다. 그의 모습을 한 다른 사람인 것이다. 이 얼마나 드라마틱한가!
내 인생 목표 중 하나가 멋진 주름을 가진 배우가 되는 것이다. 그 주름이 온갖 기억으로 가득차서, 살짝만 움직여도 이야기 보따리가 술술 풀려나왔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