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로 이성복을 만나러 가던 날은 날씨가 푹푹 삶았다. 그는 아파트 집에서 100m쯤 떨어진 서재에 있었다. 복덕방 하면 딱 좋을 허름한 골목에 작업실을 세냈다. 출입문에 수미재(守微齋)라 써 놓았다. 미미한 것을 지키는 곳이라 했다. 1970년대 대학 신문 기자 때부터 아는 사이였다. 재밌는 걸 보면 어깨를 들썩이며 웃는다든지 약간 헐렁한 모습이지만 글 쓰는 마음 끈을 꽉 조이고 산다는 느낌도 여전했다. 그는 쑥색 티에 반바지 차림이었다.

▶10년 전 계간 '시인세계'가 시인 156명에게 현대시 100년사(史)에 큰 영향을 끼친 시집을 물었다. 백석 '사슴', 김수영 '거대한 뿌리', 정지용 '정지용 시집', 서정주 '화사집' 같은 불멸의 이름이 나왔다. 쉽게 떠올릴 수 있는 문학 이정표다. 그런데 이성복의 '뒹구는 돌은 언제 잠 깨는가'도 올랐다. 시집 말고 100년사에 영향을 준 시인이 누구냐 물어도 같은 다섯 이름이었다. 다른 넷은 작고한 전설이었고 이성복만 당시 쉰셋 현역이었다.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지금 읊조려도 서늘해지는 이성복의 절창 '남해 금산(錦山)'이다. 돌보다 깊게 영원을 획득한 사랑이 해와 달, 하늘과 바다가 혼융하는 우주의 품속에 까무룩 빠졌다. 그러나 이성복 시를 몇 편씩 외우는 독자도 그가 아포리즘의 명창이라는 건 잘 모른다.

▶이성복 잠언집 '네 고통은 나뭇잎 하나 푸르게 하지 못한다'를 펼쳤을 땐 속눈썹이 다 떨렸다. 시와 삶을 벼려낸 글귀가 일부러 과녁을 비켜 간 표창처럼 쌓여 있었다. '모든 위대한 것들은 위독하다'는 대목이 절묘했다. 그가 엊그제 시집이 아닌 책을 세 권이나 냈다. 손에 쏙 들어오는 양장본에 '극지(極地)의 시' '불화하는 말들' '무한화서'라는 제목을 달았다. 강의와 대담을 엮어 자분자분 설명하거나, 시처럼 행갈이를 하거나, 서너 줄 경구마다 번호를 붙였다.

▶그는 몸이 가볍다. 키도 큰 편이 아니다. 술은 맥주 한 컵이 고작이다. 그러나 시를 쓸 땐 '마지막 화살을 쏘듯' 목숨을 건 결기를 세운다. 카프카를 인용해 "당신과 세상이 싸운다면 세상 편을 들라"고도 했다. 이때 세상이란 다른 사람이다. 어떤 관계든 자기한테 유리하게 끌고 가지 말라 했다. 그걸 어기면 시(詩)도, 기도도 의미가 없다. 시인은 온갖 어려움에도 세상 편을 드는 극지에 서야 한다. 글쓰기도 인생도 한가지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