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랭킹 5위인 그랜드슬램 챔피언과의 대결을 이토록 흥미진진하게 끌고 갈 거라고 예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무너지는가 싶으면 따라잡고, 때론 기습적으로 앞서가며 상대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그의 플레이에 세계 테니스가 깜짝 놀랐다. '한국 테니스의 희망' 정현(19)이 이번 US오픈에서 보여준 남다른 끈기와 투혼(鬪魂), 무서운 집중력은 그가 머지않아 세계 정상급 선수로 성장할 수 있음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정현(세계랭킹 69위)은 4일(한국 시각) 미국 뉴욕의 빌리진 킹 국립테니스센터에서 열린 US오픈 남자 단식 2회전(64강)에서 스탄 바브링카(30·스위스)에 0대3(6〈2〉―7 6〈4〉―7 6〈6〉―7)으로 패했다. 비록 한 세트도 따내지 못했지만 정현은 3세트 연속 바브링카를 타이브레이크까지 몰아붙이며 불꽃 튀는 접전을 펼쳤다. 경기가 열린 루이 암스트롱 스타디움(1만103석)을 메운 관중은 게임을 거듭할수록 세계 5위의 바브링카를 괴롭히는 '신예' 정현에게 매력을 느끼며 더 많은 환호를 쏟아냈다.

아쉽지만 잘했다

"한국에서 온 정현!" 장내 아나운서의 우렁찬 소개와 함께 정현이 파란색 코트로 달려나왔다. 태어나 가장 많은 관중 앞에서, 가장 랭킹이 높은 선수와 싸우는 자리였지만 정현은 힘차게 라켓을 휘두르며 긴장을 풀었다.

출발은 쉽지 않았다. 예리한 서브와 묵직한 한 손 백핸드를 앞세운 바브링카에게 내리 3게임을 내줬다. 하지만 정현은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다. 4게임에서 첫 게임을 얻은 정현은 5게임에서 바브링카를 상대로 첫 브레이크에 성공했다.

정현이 4일 미국 뉴욕의 빌리진 킹 국립테니스센터에서 열린 US오픈 테니스 대회 남자 단식 2회전에서 스탄 바브링카(스위스)의 공을 받아넘기고 있다〈위 사진〉. 1만여 명을 수용하는 루이 암스트롱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관중은 3세트 연속 바브링카를 타이브레이크까지 몰아붙인 정현에게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아래 사진〉. 미국 재즈의 전설 루이 암스트롱(1901~1971)의 이름을 딴 이 경기장은 US오픈 대회에서 아서 애시 스타디움(2만3000여 명 수용)에 이어 둘째로 규모가 크다.

2세트는 정반대였다. 정현은 당황한 바브링카가 범실을 쏟아내는 사이 착실히 포인트를 쌓아 첫 세 게임을 모두 잡았다. 타이브레이크 끝에 역전당한 정현은 3세트에서도 엎치락뒤치락하며 타이브레이크 6―7까지 끌고 갔다. 경기는 정현의 발리 공격이 아웃되며 바브링카의 승리로 끝났다.

정현은 투어 최고의 백핸드를 구사하는 바브링카에 맞서 날카로운 백핸드로 맞섰다. 정현이 3세트 동안 바브링카를 상대한 시간은 총 3시간 2분. 그는 "세트당 1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강호를 상대로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정현은 2세트 도중 다리에 쥐가 나려 하자 마사지를 받은 뒤 다시 코트에 서기도 했다.

정현은 US오픈에 참가한 10대 선수 10명 중 가장 좋은 성적을 남겼다. 8명이 1회전에서 탈락했다. 정현과 함께 2회전에 오른 니시오카 요시히토(일본)는 일곱 게임을 따내는 데 그치며 다음 라운드 진출에 실패했다. 정현은 "경기 전에 '남은 에너지를 다 쏟자'고 다짐했는데 코트에서 쥐가 나도록 뛰었으니 이 정도면 '인생 경기'를 한 게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19세 정현, 세계를 놀라게 하다

세계 랭킹 5위 스탄 바브링카(스위스).

당초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이날 경기는 정현의 예상치 못한 활약 덕분에 순식간에 최고 화젯거리로 떠올랐다. 바브링카는 경기 후 장내 인터뷰에서 "정현과의 경기는 처음이었지만 정말 힘들었다"고 말했다. 이어진 기자회견에서 초반 대부분의 질문은 '19세 투어 루키 정현'에 대한 평가를 묻는 말이었다. 바브링카는 "(기자 여러분도) 앞으로 정현을 주목해야 할 거다. 그는 잘 싸우고 포기하지 않는 선수(fighter)"라며 연신 정현을 치켜세웠다.

정현의 기자회견장에는 미국 현지 방송·신문은 물론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 매체가 다수 찾아와 높은 관심을 보였다. 정현의 어린 시절과 훈련 방법 등 세세한 부분을 물어봤다. 정현의 회견장을 찾은 리처드 에반스 ATP(남자프로테니스) 투어 마케팅 담당 시니어 매니저는 "니시코리(일본)에 이어 아시아의 새로운 '몬스터'가 탄생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ATP 투어는 경기 직후 홈페이지에 '바브링카가 정현이라는 힘든 시험을 마쳤다'는 제목의 기사를 게재했다.

USA투데이의 닉 맥카벨 기자는 "랭킹 차가 큰 선수들의 경기에서 세 세트 연속 타이브레이크까지 가는 건 이례적"이라며 "지고 있는 상황에서 정현의 집중력이 돋보였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