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윤덕 문화부 차장

그는 보들레르와 베를렌을 읊조리던 불문학도였다. 6·25가 일어난 다섯 살 때 부모 따라 평양에서 서울로 월남했지만 시대의 아픔엔 어두운 '청맹과니'였노라 고백했다. 인생이 바뀐 건 군사독재에 저항하던 한 남자와 사랑에 빠진 뒤였다. 통혁당 사건으로 구속된 남편을 옥바라지하며 반독재 투쟁에 나섰고, 자신도 감옥에 갇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칼바람 옥창(獄窓)으로 스며드는 독방에서 목젖까지 컥컥 숨 막히는 고통을 이기려 철문 배식통으로 머리를 들이밀었다는 얘기가 자서전에 나온다. 절망에도 무릎 꿇지 않은 건 여동생이 보내준 본회퍼의 옥중 서간집 덕분이었다. 나치에 저항하다 게슈타포에 총살당한 독일 신학자 본회퍼는 '매 맞는 것, 죽는 것이 고통스러운 건 아니다. 나를 참으로 괴롭힌 것은 내가 감옥에서 핍박받는 동안 밖이 너무 조용하다는 사실이다'고 썼다.

한명숙. 그 이름 석 자는 한국 여성운동의 '순정'과도 같은 것이었다. 민주화 이후 여성운동에 뛰어들어 가정폭력방지법, 성매매특별법, 호주제 폐지라는 한국 여성들 숙원을 차례차례 일궈나갈 때 대열 맨 앞에 서 있던 이가 한명숙이다. 따뜻한 미소, 푸근하고도 단호한 목소리는 '대모(代母)'라는 수식에 어울렸고, 차별의 아픔으로 눈물 흘리는 여성들에겐 한없이 너른 품이었다. 그가 여성부·환경부 장관에 이어 대한민국 최초의 여성 총리로 임명됐을 때 자신의 승리인 양 기뻐한 여인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런 한 전 총리가 불법 정치자금 수수 혐의로 그제 서울구치소에 수감됐다. 상복(喪服)에 백합을 들고 선 그가 배웅 나온 지지자들을 향해 "사법 정의는 죽었다"고 외칠 때 가슴으로 서늘한 바람이 훑고 지나갔다. 대법관 전원이 유죄를 인정한 명백한 증거 앞에서 정치 탄압을 주장할 만큼 그의 양심과 정의감을 무뎌지게 한 건 무엇일까. 모든 걸 잃게 될까 두려웠을까. 억울할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한 돈을 받고도 법망을 피한 정치인이 한둘이 아닌데 왜 유독 자신에게만 가혹할까. 그러나 티끌만 한 흠도 보여선 안 되는 게 '최초 여성'들이 감내해야 할 숙명이다. 여성에게 감투란 영광이기 전에 시험대이며, 온갖 유혹을 물리치며 짊어지고 가야 할 십자가임을 정녕 몰랐을까.

한 전 총리는 정치 인생의 가장 큰 버팀목이었던 여성들에게 사과부터 했어야 한다. 그를 정계에 입문시킨 비례대표 여성 할당제는 남성 정치인들과는 다른 청렴함과 실력으로 사회 약자들 목소리를 대변하란 뜻에서 여성운동이 관철해낸 성취였다. 그 '여성' 몫으로 총리 된 이가 한명숙이다. 한 여성학자는 "여성이란 이유로 맹목적 지지만 했지 도덕적 해이를 모른 체했던 여성계도 뼈를 깎는 반성을 해야 한다"며 참담해했다.

서울구치소는 36년 전 민주화를 위해 싸우던 한 전 총리가 갇혔던 곳이다. 한 손에 성경을 들고 구치소로 들어가는 칠순 여인의 뒷모습을 보니 가슴이 저렸다. 본회퍼의 말이 떠올랐다. "그들은 십자가를 이용했지만 사랑하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