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일 서울시 종로구 종각역 부근. 오후 2시 민방위 훈련이 시작됐지만 행인들은 훈련이 시작된지도 모른 채 유유히 걸어 다니고 있었다. 훈련을 알리는 사이렌은 인근 상가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소리에 묻혔다. 버스 정류장엔 시민 10여명이 버스를 기다리며 스마트폰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민방위 통제관으로 나온 종로구 공무원은 "시민들이 훈련에 협조하지 않아 사실상 대피 훈련은 안 된다고 봐야 한다"며 손을 놓고 있었다.

민방위 대피 훈련이 시작된 19일 오후 대전 충대정문오거리에 대피 사이렌이 울리고 민방위 통제관이 대피를 지시했지만 통제에 따르는 차량과 시민을 찾아보기 힘들다(사진 위). 비슷한 시각 서울 경복궁 인근 지하 대피소에서도 통제에 따라 대피한 시민을 찾아볼 수 없었다(사진 아래).

1975년 7월 민방위 기본법이 제정되면서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되는 민방위 훈련이 자리 잡은 지 40년이 됐지만 훈련은 여전히 실효성 없게 진행되고 있었다. 1988년까지는 연간 12회, 1991년까지는 연간 9회 실시되던 훈련은 이후 국민 불편 등을 고려해 연간 3~4회로 줄어들었지만 내실 없는 훈련 내용에 국민 불만은 여전하다. 대부분의 국민은 "결국 내 안전에 도움이 안 될 것 같은 훈련에 20분 남짓을 투자하는 것조차 아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날 훈련은 북한 장사정포나 미사일을 통한 공격에 대비하는 차원으로 전국 읍 이상 모든 지역에서 실시됐다. 적 공격을 가정해 진행되는 훈련이었지만 지하철역 등 지하 대피소로 신속히 몸을 옮기는 이는 거의 없었다. 공습에 대비한 대피소는 전국에 2만3444개(서울 3982개)나 있지만, 지자체 공무원조차 정확한 위치를 모르는 경우도 있었다. 강남의 한 주민센터에 가 대피 장소를 묻자 "구청에 문의하셔야 할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왔다.

확실한 통제나 매뉴얼 없이 진행되는 훈련은 엉망이었다. 서울 광화문광장 한쪽 인도에서 통제관 5명이 시민들에게 "지하로 들어가라"고 안내했지만, 일부 시민은 통제관 옆 벤치에 앉아 대피할 생각도 하지 않았다. 통제관들은 "우리가 강제로 시민을 지하로 내려가게 할 방법은 없다"며 "제도가 세련되지 못한 면이 있겠지만 시민의식도 문제"라 했다. 신촌역 인근에서 만난 주부 김모(37)씨는 "시나 구에서 적극적으로 안내하면 협조할 마음이 있는데 (민방위 통제관들도) 다들 멀뚱멀뚱 있으니 나 혼자 대피하기도 민망하다"고 했다.

기본적인 매뉴얼도 무시됐다. 일부 대형 건물은 "구청(서대문구)의 협조 요청을 받지 않았다"며 엘리베이터를 평상시처럼 가동했다. 광화문 KT 사옥에서는 가상의 테러범 2명이 생물학 무기를 가정한 하얀 분말을 살포하고 시민들이 대피하는 모의 훈련도 실시됐다. 그러나 대피 지시에 따라 느릿느릿 사옥에서 빠져나온 사람들은 손수건이나 마스크 등으로 입과 코를 가리지도 않았다. 50대 남성은 "애들 장난 같아 시간만 아깝다"고 했다. 광주광역시 일곡동에서 화재 대피 요령 등을 교육하던 소방 관계자는 "세월호 사고 이후에도 시민들 안전의식엔 변화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국민안전처는 '가족 단위 비상대응 능력 강화 훈련을 추진한다' '학생 안전 강화를 위해 학교 생활 안전 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는 등 다양한 훈련 내용을 내놓고 있지만 졸속인 것 같다는 반응이 많다. 해외에서 대규모 지진이 발생하면 지진 대비 훈련, 정전 사태가 이슈가 되면 정전 대비 훈련 계획을 내놓지만, 국민이 적절한 대비 요령을 체득했다고 느끼기엔 역부족이다. 메르스 사태 이후 처음 열린 이번 민방위 훈련은 '생물방어'라는 주제로 열렸지만, 정작 적이 생화학 무기를 사용했을 때 1차 저지선이 돼야 할 병원은 훈련에서 제외되는 등 큰 틀에서부터 현실성이 떨어졌다.

어제 오후 2시14분… 민방위훈련에도 아랑곳 않는 명동 - 민방공 대피 훈련을 알리는 사이렌과 대피 안내 방송이 울려 퍼진 지 10여분이 지난 19일 오후 2시 14분쯤 서울 명동의 시민 대부분이 훈련 안내에 응하지 않고 평소처럼 거리를 거닐고 있다. 이런 실효성 없는 민방위 훈련 모습은 이날 전국 많은 지역에서 목격됐다. 형식적 민방위 훈련을 위해 전국 모든 산업시설과 기업·공공기관 및 교통 등이 20분간 멈추는 데 따른 국가적 낭비는 2377억원으로 추산됐다.

민방위 훈련 관련 예산은 2013년 홍보 예산 2억원이 추가되면서 한 해 4억8000만원 규모로 유지되고 있다. 훈련 준비 및 실시를 위해 지자체 공무원과 경찰·소방 관계자들이 동원되는 행정력 낭비도 크다. 하지만 무엇보다 전국의 모든 산업시설과 공공기관, 교통 등이 20분간 동시에 멈추면서 발생하는 경제적 손실은 엄청나다. 2014년 기준 국내총생산(GDP)은 1485조780억원으로, 이를 연평균 근로일 수(245일)와 평균 근로시간(하루 8.5시간)으로 나눠보면 전국이 20분간 정지하는 데 따른 국가적 낭비는 2377억원으로 추산된다.